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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시간 주 랜싱에 있을 때의 일입니다. 랜싱은 미시간 주의 주도입니다. 주도라 해도 미시간 주립대학을 중심으로 형성된 작은 시골 도시입니다. 내가 거주하고 있었던 동네는 니모키 트레일에 있는 아담한 아파트촌이었습니다.
아파트라 해도 우리처럼 고층이 아니고 2,3층 정도 되는 연립주택 규모의 주택들이 여러 동 한 마을을 이루며 들어서 있고 사이사이 단독주택들도 있는 한적하고 조용한 곳이었지요. 주변은 자연 그대로의 숲이며 나무며 연못이며 풀들이 자라고 시시때때로 꽃이 피었다가 지는 아름다운 곳입니다. 여름 어느 날이었습니다 갑자기 비가 쏟아져 연못가 처마 밑에서 비를 피하고 있었습니다.
사람이라고는 보이지 않는 곳에서 비는 장대처럼 쏟아져 내리고 우두커니 앞을 보고 있는데 어디선가 나타났는지 삽살개 한 마리가 멀리서 나를 향해 다가 왔습니다. 삽살개가 한국 토종개라고 알고 있었던 나는 깜짝 놀랐습니다. 비를 맞으며 개는 나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습니다. 어떻게 보니 개도 나를 알아보는 것 같았습니다.
어디서 어떻게 여기까지 흘러 왔는지 작은 연못가를 헤매다 처마 밑에서 비를 피하고 있는 나를 발견하고 내게로 다가온 것 같았습니다. 비를 맞으며 혼자 떠도는 이유는 알 길이 없었지만 아득히 먼 고향을 그리워하는 처지는 같아 보였습니다. 비에 젖어 축 처진 털 사이로 보이는 까만 눈동자, 나를 빤히 쳐다보는 장대비 속의 눈이 호수를 닮았습니다.
빗속에서 빛나는 눈 나는 그 눈을 어디에선가 본 듯도 했습니다. 그래요 언젠가 백두산에 올랐을 때 장대비가 그치자 나타난 투명한 천지, 검은 바위산에 둘러싸여 빛나던 호수를 한참동안 바라보며 나는 그것을 해맑은 눈동자라 생각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래요 거기에 비친 하늘에 가끔 얼룩져 보이던 것은 우주의 그림자가 비쳐 언뜻언뜻 사라지는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불현듯 삽살개가 비를 흠뻑 맞고 다니는 것도 어쩌면 호수가 되고 싶어 하는 것일지도 모를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니모키 트레일의 비를 맞으며 나는 머나먼 천지를 떠올리고 삽살개는 나를 보며 떠나온 고향 마을을 기억해 내고 있었을 겁니다. 내 모습에서 된장냄새며 김치냄새며 마늘냄새가 났었던 것이겠지요. 그의 속내를 알 길은 없었지만 바라보는 눈빛만으로도 서로 통하고 있다는 사실을 나는 알고 있었고 서로의 처지를 생각하며 묵언으로 서로를 위로하고 있었습니다. 얼마 안 있어 니모키 트레일에 비가 그치면 우리는 또 끝없는 유랑을 시작할 것이라는 사실까지 알고 있는 듯 했었지요.
누군가 붙잡아 줄 사람도 이유도 없이 우리는 그렇게 헤어졌었지요. 그를 떠나보내며 기억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풀려나왔고 나는 점점 깊은 물속으로 빠져들었습니다. 혼돈이었습니다. 그러나 장대비 속에서도 기억만은 삽살개의 눈빛에서 실타래처럼 풀려나왔습니다.
먼 이국땅에서 장대비와 삽살개와 비를 맞은 삽살개의 눈동자에서 이미 사라져 묻혀버린 기억들이 신기하게도 풀려나왔고 나는 촘촘하게 기억을 되살려 내고 있었습니다. 혹시 저처럼 기억상실증을 앓고 계신다면 비를 맞고 떠도는 삽살개의 눈빛을 연상하며 비를 맞아보는 것은 어떠실지요.
[불교신문 2778호/ 12월21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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