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명 詩 138

거기 누구 없소

거기 누구 없소   아랫마을에서 검은 고양이 한 마리 올라왔다 내려갔다 눈이 무서웠다  다음날은 흰 고양이 한 마리 올라왔다 내려갔다 눈이 무서운 건 마찬가지다  서로 마주칠 때는 으르렁거리더니 서로 피했다 번갈아 오르락내리락하는 고양이 무슨 일이 있어 이 산중을 오르내리는 걸까  한동안 고양이는 보이지 않았다 새들은 여전히 지저귀고 숲은 고요하고 꽃은 피고  매일 창밖을 내다보고 있던 어느 날 문득 마루 밑에서 검은 바탕에 흰 무늬라 할지 흰 바탕에 검은 무늬라 할지 새끼 고양이 한 마리 나왔다 들어간다  서로 으르렁거리던 것들이 언제 마루 밑에 들어와 눈이 맞았는지  흑백의 조화온 세상이 환하다   문학의 창 2025년 봄호

이명 詩 2025.03.18

가는 길

가는 길   세상은 왜 이리도 험한지 희미한 불빛 아래한 잔 술을 마시며 파도를 넘는다  폭염에는 사막을 가는 낙타처럼 혹한이라도 설원을 건너는 순록처럼 가야만 하리 한 잔의 술을 마시면 나는 불콰해지고그곳이 어디든 너는 으레 말을 걸어온다 어둠이 내리면 내리는 대로반딧불이가 길 밝히고낮에도 달맞이꽃 피는 그곳으로 거침없이 가야만 하리 한 잔 술을 마시며네가 나에게 일러주는 말 술잔 속에는 틀림없이 네가 있다  문학나무 2025년 봄호

이명 詩 2025.02.28

그리운 너울

그리운 너울     구룡령을 넘어가 보자 네가 있을 것만 같은 구룡령 넘어 바다에 가 보자 구룡령은 그대로 이고 바다도 그대로 인데 그 너머에 너는 없고 이제 경복궁역 1번 출구에는 갈 일이 없어지고 주엽역에도 갈 일이 없고 바다로 돌아와 해변에서 너를 불러보는데 불러도 대답 없는 이름을 불러보는데 불쑥 솟아오르는 물결 너일 것만 같아 바람은 샛바람 대답 없는 대답이 밀려온다 한 줄의 글이 부풀어 오르고 몇 줄의 글이 밀려오고 너를 잃어버리고 네가 바다라는 것을 안다 할 말이 많구나 이럴 줄 알았으면 좀 더 자주 만날 걸 바둑도 좀 더 두고 정신세계에서 마음껏 날아다닐 걸 그 많은 조개들은 다 어디로 갔나 껍질만 파도에 밀려오네 너는 이제 구룡령을 넘는 바람이고 기사문 물결이고 어디서나 허공이네 허공에 ..

이명 詩 2025.01.04

밤의 전령사

밤의 전령사   전등을 켜자고라니 한 마리 눈에 들어왔다그물망 울타리를더 높게 세워 올린 날 밤이었다꼼짝도 하지 않고 불빛을 바라보고 있었다 주변에 뭔가 움직임이 있어 자세히 보니새끼였다젖을 빨고 있었다 푸르게 빛나는 눈빛어느 별에서 왔는지 순간그대로 두어야겠다고 생각했다불빛도 거둬들였다 울타리는 그대로였고 문은 잠겨 있었으나천개의 다른 길이 있었다 가을바람 때문에꾀꼬리도 숲으로 들어간 지 이미 오래고나무는 잎을 떨어뜨리고하늘에서는 별이 총총 빛났다 문득 사라진 별 하나가 생각났다  문예바다 2024년 여름호

이명 詩 2024.08.06

바늘엉겅퀴

바늘엉겅퀴 뿌리가 몸에 좋다고 그러나 함부로 건드리지 마세요 아직 어리지만 바다와 산과 바람의 눈길이 느껴져요 꽃을 보면 알잖아요 내가 얼마나 붉은 줄 그건 사랑이 속에서 용솟음치기 때문이에요 기다려 주세요 내 몸의 털이 더 날카로워질 때까지 변방에 있지만 꽃잎이 활짝 열릴 때 그때 내 입술을 가지세요 바람을 견딜 수 있을 때까지 내가 당신 몸에 약이 될 때까지 시인정신 2024년 봄호

이명 詩 2024.04.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