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명 詩 138

그때는 비

그때는 비 마늘 씨알이 작은 것은 마늘종을 제때 뽑지 않아서 그렇다는데 작고 맵고 아린 그 여자의 밭 조선 마늘에는 환향하는 여인의 눈물이 들어 있어 새벽에 내려가 보면 잎은 물방울로 가득하고 밭은 흥건하다 바짓가랑이가 흠뻑 젖고 마늘종을 뽑으면 자지러지는 소리가 난다 홍제천이 거슬러 오르고 허공이 내려앉고 중심이 단단한 기둥을 송두리째 뽑힌 마늘은 대들보가 사라진 집안처럼 후줄근하다 이제는 메말랐는지 마늘종 끝에 맺혀있는 맵싸한 눈물 한 방울, 벼락 한 올 오늘 새벽에는 까마귀 한 쌍이 소나무 숲에서 마늘종을 다 뽑을 때까지 따라다니며 대신 울어주었다 현대시 2022년 10월호

이명 詩 2022.10.20

숲은 지금 수업 중

숲은 지금 수업 중 어린 새 한 마리가 달려간다 바람이 달려간다 꿩 한 마리가 같은 방향으로 달려간다 숲이 새를 맞이한다 또 어린 새 한 마리가 같은 방향으로 달려간다 나무는 육중하고 그늘은 나무 뒤에 자리한다 뱀 한 마리가 부리나케 그늘로 들어간다 유년이 달려가고 있는 중 나이를 숨기고 있는 중 또 다른 새 한 마리가 기둥 뒤에 숨는다 새는 보이지 않고 숲만 분주하다 기둥만 보인다 무대가 넓다 우듬지는 불룩하고 밑동에 벗어놓은 신발들이 수북하다 잊어버린 것이나 잃어버린 것들을 정기 구독 중 글 읽는 소리로 숲이 요란하다 산림문학 2022년 여름호

이명 詩 2022.07.04

중림동 파출소

중림동 파출소 바람이 심하게 불던 날 밤 덜컹, 출입문이 열리더니 쓰레기봉투 하나 날아들었다 얼핏 보기에 어느 곳에서 유용하게 쓰이던 시절이 있었을 것 같은데 서부역 주변에 오래 머문 탓에 가볍다 대로변을 날아다니는 것은 불법이므로 당직은 수갑을 채웠다 그리고 바로 묻는다 이름이 뭐냐고 어디서 무엇을 하며 살아왔느냐고 무슨 죄를 짓고 날아다니느냐고 그냥 죽게 내버려둘 수는 없다며 내력을 캐는데 열중이다 같이 먹고 살자며 당직은 나직이 속삭이며 어르고 달랜다 잘못 날아들어 왔으니 1초만 여기서 내보내 주면 귀찮게 하지 않고 바로 죽어버리겠다고 도로 호통친다 바람 따라 날아들어 왔지만 한 번 들어오면 이름을 밝혀야 하는 곳 당직은 정의사회 구현을 위해 다시 한 번 정중히 묻는다 이름이 뭐냐 쓰레기라니까요 문..

이명 詩 2022.06.09

황제의 귀환

황제의 귀환 사당역 뒤 골목길 술 취하면 길바닥에 눕는 사람 그는 전생에 몽골 초원 출신일지도 모른다 바이칼 호수 구릉에 누워 어린 시절을 보냈거나 정복자의 칼을 휘두르며 달리다 사막 어디에나 누웠을 그렇게 구름을 보고 하늘을 보고 별을 보았던 습관이 그를 눕게 하는지도 모른다 눈빛이 사막 같아서 바람은 모래알처럼 모였다 흩어지고 별들이 쏟아지고 줄지어 달려오는 차량들은 어둠 속 한 무리의 기마병 사람들은 물결처럼 흘러갔다 말발굽도 사라졌고 사랑도 떠나갔다 사라진 것들은 모두 하늘에 있어 술에 취한 그가 눕는다 시선은 굽타산의 깃발, 광막한 가지 끝에서 매미는 여전히 울고 살아있다는 서러움에 결코 일어나지 않는 사람 이제는 와불 대로는 야단법석 말발굽 소리 까마득한 곳에서 별이 빛났다 문학과 창작 202..

이명 詩 2022.06.09

서종을 지나며

서종을 지나며 길은 똬리를 틀고 있었다 꽃 무게를 이기지 못하여 늘어지는 자미화처럼 흔들렸다 숲은 습하고 그 숲속에서 사랑 말고 무엇을 더 요구하겠는가 비 쏟아지면 밭에 나가 엉겅퀴가 되겠네 어둠의 이불 속으로 숲은 쓰러지고 바람이 숲을 덮는다 물이 고여 웅덩이가 생기면 내려가 절구를 찧겠네 강물처럼 흔들리며 눈물짓던 숲이 어둠 속에 미소가 소처럼 밭둑에 눕다 바람이 흔드는 말을 들으며 별 쏟아지면 숲속에 스며들어 마가목이 되겠네 삶은 무덤처럼 자라나 무성했다 땀이 비 오듯 쏟아지고 나무는 쓰러지고 허수아비 같았다 그 숲속에서 가난했네 어둠으로 통하는 길에 오로라가 춤을 추고 있었네 꽃향기를 이기지 못하여 늘어지는 자미화처럼 흔들렸네 모든 숲은 사랑으로 통하고 그 숲속에서 죽음 말고 무엇을 더 요구하겠는..

이명 詩 2022.05.05

텃골의 산

텃골의 산 앞산은 털 달린 짐승이다 동이 트기 전 산을 내려와 바다를 향해 엎드린다 바다에 주둥이를 처박고 입을 헹군다 밤새 등의 털은 들쑥날쑥 엉켜 있다 먹이를 미처 소화 시키지 못한 몸이 꿈틀거리며 울컥울컥 토해 놓으니 바다가 방파제 위까지 솟구친다 파문에 먼 바다까지 하얗게 구겨지는데 입을 헹군 물이 번져나가 바다는 서서히 핏빛으로 물든다 놀란 고기들은 그물에 몸을 맡기고 때맞춰 어부들은 배를 몰고 수평선으로 달려가고 빛은 수거되고 그물은 배가 부르다 아이들이 잠에서 깨어날 즈음 산은 요동을 멈춘다 산이 잠든 시간 낮은 너무나 적막해서 사람들은 산이 짐승이라는 걸 모른다 문학 수 2022년 05/06월호

이명 詩 2022.05.05

가을장마

가을장마 가을장마는 섧다 배추에 무름병이 와서 밭을 갈아엎고 베어 놓은 들깨는 썩어가고 감은 떨어지고 사랑이 흘리고 간 눈물로부터 장마는 시작되었다 더 이상 비를 멈추게 할 수는 없지만 깨알 바닥으로 떨어지는 소리 비둘기는 들깨 더미에 산다 밭은 투전판 사랑이 혼절하고 비옷을 입고 매일 밭에 나와 비를 맞는 일이 일이다 월간 모던포엠 2021년 12월호

이명 詩 2021.12.01

숲속에 바다

숲속에 바다 바다는 하얀 마스크 나는 검정 마스크 나는 숲속에 있고 바다는 하늘을 떠 다녀요 우리는 수평선에서 만나지만 안타까워요 서로 알아보지 못한다는 것이 나무와 바다 사이 바람이 있고 바다와 나 사이 벽이 생겼어요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바다는 무지개 마스크 나는 무명 마스크 털어내야 하는 그 무엇이 있어 바다는 도시로 떠나고 나는 바다의 발자국 소리에 귀를 기울여요 층층나무는 바다를 품고 창공을 향해 날개를 펼쳐요 모르는 사이처럼 파도는 도시에서 방파제를 넘고 나는 창을 닫아요 잃어버린 바다 사랑만이 남아 허공이 불타고 있어요 누가 불 질렀다고 해야 하나요 바다는 구름 마스크 나는 허공 마스크 모두가 슬픔을 이야기 하면 누가 기쁨을 말해요 모두 우울하다고 말을 하면 누가 즐거움에 대해 말하나요 모..

이명 詩 2021.07.06

분천동 속으로

분천동 속으로 바라보면 그 아름다움은 신선과 같았으니 아, 선생은 이미 강호의 진락을 얻었다*는 말 실감하겠네 늙은 부모 수연壽宴을 위해 강변 솔숲에 커다란 그늘막 두 개 치고 정자 언덕 위에도 상을 차리고 악사들을 부르고 조각배 두 대나 강물에 띄운 것을 보면 중양절을 맞아 국화주를 마시고 남해南陔와 백화白華를 번갈아 연주하여 흥취를 돋우고 또 웃음을 위해 몰래 작은 배에 기녀를 태워 장구 치고 피리 불며 멀리 강 가운데로 노 저어 가게 하였다**고 그날 모습 상세하게 전해주네 영지산 아래 부내마을 집들이 보이고 안개가 흐르고 한쪽 구석에 바리바리 짐을 싣고 온 말도 보이고 분주하게 움직이는 여인들도 있네 종택도 보이네 눈높이를 맞춰야 잘 보이는 분천헌연도, 산중이 환하네 * 농암聾巖 이현보가 지은 어..

이명 詩 2021.07.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