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人의 말 詩人의 말 바다가 생활의 일부였던 때가 있었다 내 가슴 깊은 곳에 출렁이고 있는 유년의 바다, 활화산 같은 그 바다에 다시 서고 싶다 퍼내어도 퍼내어도 마르지 않는 샘, 그 깊이를 모르겠다 캄캄 어둠의 늪을 헤매며 다닌다 나를 찾아 나선 길 길인 곳에 길은 없었다 길이 아닌 곳에 길.. 시집 앵무새 학당 2013.09.27
(Ⅰ 앵무새 학당) 나도 홍단풍나무 나도 홍단풍나무 가마솥에 갓 쪄낸 여린 가을햇살 한 말을 달빛에 푹 삭혀 빚어낸 곡차 한 사발 쭉 들이켠다 산사 바위에 걸터앉아 보장각과 범종루 사이를 지나가는 바람 한 줄기 계곡 물소리에 얹어 쌈을 싸 안주한다 공포불상을 바라보다 취해 절집 마당에 내려와 앉은 등신불 단숨에 .. 시집 앵무새 학당 2013.09.27
수목원 두꺼비 수목원 두꺼비 남산 수목원 작은 연못 수련 잎 위에 두꺼비 한 마리 정좌를 하고 있다 물방울을 안고 앉은 모습이 남방계 부처님 같다 물방울을 통하여 세상을 본다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인 세상이 거꾸로이다 갈대도 부들도 거꾸로 세워 놓은 수막에 감도는 팽팽한 긴장 물방울의 영혼은 .. 시집 앵무새 학당 2013.09.27
화중신선花中神仙 화중신선花中神仙 무너미 비탈길에서 만난 명자나무 바람이 잔가지 사이로 치렁치렁한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고 있다 이곳에 뿌리내린 지 수십 년이 지났나 보다 터진 껍질 사이로 군데군데 하얗게 흘러내린 진액이 단단히 말라붙어 있다 그렁그렁한 꽃망울 누구는 산당화라 하기도 하고.. 시집 앵무새 학당 2013.09.27
형상, 미완성 알파와 오메가 형상, 미완성 알파와 오메가 미황사 부도전, 며칠 동안 눈이 내리자 모두들 사람 형상을 하고 있습니다 크고 작은 돌들로 몸을 만든 것도 있고 소나무를 뼈로 한 것도 보입니다 귀가 없는 것도 있고 팔은 생기다 말고 한쪽 구석에 옹기종기 모여 있는 일곱은 한 가족 같습니다 하늘 사람들.. 시집 앵무새 학당 2013.09.27
함곡관 산양 함곡관 산양 설악산 저항령 계곡 절벽 깎아지른 바위틈 사이 유유히 걸어가는 산양 한 마리 안개 속으로 사라졌다 나타났다 바람에 날리는 턱수염 뒤로 젖혀진 뿔 그 모습이 유건을 쓰고 흘러가는 한 조각 구름 같다 돌아보는 눈빛이 하늘을 닮아 있다 몇 발자국 따라가 보지만 길은 보이.. 시집 앵무새 학당 2013.09.27
앵무새 학당 앵무새 학당 1. 유위有爲 나는 한 번도 앵무새 울음소리를 들어 본 적이 없다 앵무새가 울음 우는 것을 보지 못했다 앵무새의 울음소리를 들어 보기 위해 버드랜드를 찾았다 앵무새를 길들인다는 버드랜드에서 앵무새가 울기를 기다렸다 버드랜드 철창 안에는 앵무새들이 모여 있었다 앵.. 시집 앵무새 학당 2013.09.27
하늘 그물 하늘 그물 대웅전 처마가 그물에 걸렸다 그물코 사이로 군데군데 새들의 빈 집이 보인다 제석천의 그물에는 매듭마다 아름답고 맑은 구슬이 달려 있다는데 구슬은 서로를 비추고 있어 한 개의 구슬에 모든 구슬이 다 머물고 있다는데 단청에 거소를 둔 새들은 당분간 노숙을 해야 할 것이.. 시집 앵무새 학당 2013.09.27
무위이무불위無爲而無不爲 무위이무불위無爲而無不爲 아기를 등에 업은 코알라가 잠만 자고 있는 것이 유칼리나무는 안타까웠다 세상 풍경이 아름답다고 여러 갈래 선택할 길도 많다고 넓은 세상으로 나가길 원했지만 코알라는 유칼리나무 줄기를 붙잡고 잠만 자고 있었다 그 잠이 워낙 깊어서 양팔을 벌려 그늘.. 시집 앵무새 학당 2013.09.27
개심사 오르는 길 개심사 오르는 길 어디선가 날아온 곤줄박이 한 마리 저만치 앞장서 간다 힐끔힐끔 돌아보며 종종걸음으로 간다 뒷목과 가슴에 두른 황갈색 무늬가 후박나무 그늘 속에서 뚜렷하다 걸음을 빨리해 보니 엉거주춤 두 날개를 벌리고 뒤뚱뒤뚱 달려간다 천천히 걸으니 아롱거리는 숲 그림자.. 시집 앵무새 학당 2013.09.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