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人의 말 詩人의 말 아궁이 속에서 활활 타오르는 불을 보았다 가마솥이 달아오르며 물이 펄펄 끓고 있었다 나는 잔솔가지를 꺾어 불길 속으로 자꾸 던져 넣어 주었다 어디론가 빨려 들어가는 불길을 신기해하며 즐거워한 적이 있었다 길게 한 획을 내리긋고 싶다 마천십연(磨穿十硏) 독진천호(禿.. 시집 분천동 본가입납 2012.09.29
(Ⅰ분천동 본가입납) 적멸보궁 적멸보궁 상원사 계곡에서 침향 홍주를 마신다 노을빛 술 속에 결가부좌한 천년 향나무 계곡 물소리 거세질수록 침향은 물소리 따라 퍼져나간다 술을 거듭할수록 홍주의 깊은 바닥에 가라앉은 침향의 육괴, 온 몸으로 독주를 받아들이며 기울어진 병 속에서도 중심을 잃지 않는다 가부.. 시집 분천동 본가입납 2012.07.24
분강 오감지도 분강 오감지도 1. 분강촌汾江村 청량산에 구름이 끼니 영지산에 비가 내린다 영지산에 비가 오니 투구봉이 우산을 쓰고 걸어온다 두꺼비는 부동지不動地에 터를 잡는다 돌기둥을 껴안고 잠을 잔 두꺼비가 임신을 한다 돌덩이를 낳는다 2. 귀먹바위(聾巖) 강물에 발을 담그고 있다 곁에 앉.. 시집 분천동 본가입납 2012.07.24
분천동 본가입납 분천동 본가입납本家入納 태어나 최초로 걸었다는 산길을 돌아 푹신한 나뭇잎을 밟으며 청주 한 병 들고 능선을 밟아 내려갔니더 누님이 벌초를 해놓은 20년 묵은 산소는 어둡고 짙은 주변의 빛깔과는 달리 어찌나 밝은지 무덤이 아니었니더 봉긋하게 솟아오른 아담한 봉오리 그랬니더, .. 시집 분천동 본가입납 2012.07.24
박호순미장원 박호순미장원 문짝마다 커다랗게 한 글자씩 유리창에 붉은 글씨로 상호를 써놓은 박 호 순 미 장 원 문짝을 받치고 있는 도르래는 녹이 쓸어 레일 위를 구르지 않는다. 앞 뒤 순서도 없이 들어서 밀어야 열 수 있고 닫을 수 있는, 훤하게 안이 들여다보이는 문짝 굴렁쇠를 굴리며 하루에도.. 시집 분천동 본가입납 2012.07.24
오감지도 따라 걷다 오감지도 따라 걷다 맹아학교 그림 전시회장에서 점자를 더듬던 손가락으로 석현이가 그린 오감지도 삐뚤빼뚤 번호가 매겨져 있는 길을 따라가 본다 1. 교실을 나와서 쭉 걸어가면 여자 화장실이다 2. 오른쪽으로 내려가면 왼쪽에 식당이 있다 지날 때마다 맛있는 냄새가 나서 좋다 3. 이.. 시집 분천동 본가입납 2012.07.24
헛제사밥 헛제사밥 나물과 멧국수 사이로 김이 솔솔 올라온다 붉은 색 하나 걸치지 않은 밥이 은연중 고택을 닮았다 맨 간장에 비빈 나물밥에서 무명옷 냄새가 난다 고사리는 비녀 틈새를 빠져나온 17대 순흥 이 씨 할매 머리카락 한 올처럼 꼬부라져 있다 삶은 무채는 고조부 도포 자락처럼 후줄.. 시집 분천동 본가입납 2012.07.24
애일당 산조 애일당 산조 애일당 대청마루 한 낮 곤히 잠자는 아이 얼굴 위로 하루살이 잉잉대다 볼에 앉는다 단내 나는 입술 쪽으로 기어간다 입이 실룩거리자 멈칫 멈칫 브레이크를 밟았다 놓았다 한다 성능이 좋다 망고 맛 같기도 하고 코코아 맛 같기도 하고 향기에 취한 하루살이 꿈결 같은 수밀.. 시집 분천동 본가입납 2012.07.24
부내마을 쇠박새 부내마을 쇠박새 아카시아꽃 잔치, 고봉밥이 즐비하다 아지매밥좀줘 쯤으로 들리는 쇠박새 소리가 쉼 없이 숲속에서 들려온다 실로 꿰맨 바가지를 겨드랑이에 끼고 끼니때마다 찾아오던 이십대 여자 등에 업힌 아기 양볼에 묻어있던 아카시아꽃잎 같은 눈꽃이 떨어진다 그 때, 밥 때가 .. 시집 분천동 본가입납 2012.07.24
색즉시공, 공즉시색 색즉시공, 공즉시색 열무 잎 속에 싸인 고추 덩어리를 씹었다 푸른 잎 속의 푸른 고추, 칼이 몇 번을 잘게 토막 내려 지나갔겠지만 무쇠도 아, 하고 칼집만 내 놓고 비껴간 덩어리 입 안이 얼얼하고 눈물이 핑 돌았다 오그라든 열무 잎 속에서 두 눈을 시퍼렇게 뜨고 내다보고 있었을 것이.. 시집 분천동 본가입납 2012.07.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