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궁이 앞에서 아궁이 앞에서 묵은 솔가지 한 단 들여 놓고 불을 지펴요 관솔에 이는 불꽃, 입 벌린 아궁이가 파래요 불꽃도 멍이 드나요 외솔 옹이의 멍은 얼마나 단단하고 깊은가요 또 얼마나 시리고 적막한가요 새카맣게 탄 아궁이 속, 그 속 진액이 흐르는 것이겠지요 쌓였던 내공이 깊은 주름 사이.. 시집 분천동 본가입납 2012.07.24
푸른 접속 푸른 접속 민락동 수변공원 옆 수영강에 문짝 하나 떠내려 와 방파제에 걸려있다 물속에 반쯤 걸려있는 문고리 강물이 맴 돌며 문고리를 잡아 흔든다 대문 사이로 강물이 드나든다 파도를 따라온 물결이 물결을 따라 온 고기 떼가 대문을 드나들고 있다 옛집이다 강물이 반짝이며 소리 .. 시집 분천동 본가입납 2012.07.24
원숭이 조련법 원숭이 조련법 조련사가 바나나 한 개 들고 바위 사이 공중에 걸린 외줄을 올려다보며 손짓한다 자신이 없는 듯 바위에 걸터앉아 엉거주춤 내려다보는 원숭이 줄타기 훈련에 진땀을 흘린다 보이는 것은 바나나뿐 조련사의 손짓에 놀라 발을 헛디디며 바닥으로 나뒹군다 조련사의 눈에 .. 시집 분천동 본가입납 2012.07.24
자목련 앞에서 자목련 앞에서 자목련 꽃봉오리 도톰하게 부풀더니 오늘 새벽 따옴표가 되었다 빈 가지 위에 생긴 수많은 작은따옴표 전할 말이 있나보다 가슴이 붉은 멧새 한 마리 창가 가지에 찾아와 가슴 털을 털며 무어라 몇 마디 내 뱉고 간다 “ㅉㅉㅉㅉㅆㅆㅆㅃㅃㅃㅃㅇㅇㅇ” 그 아래 가지에서 .. 시집 분천동 본가입납 2012.07.24
품이 넓은 세상 품이 넓은 세상 이른 새벽 마당을 쓰는데 잎사귀 하나 대나무 빗자루에 매달려 떨어질 줄 모른다 밤이슬 맞고 촉촉이 젖어 대나무 잔가지에 찰싹 달라붙었다 마당을 쓸다 말고 앉아 우두커니 잎사귀를 바라본다 생각을 끊지 못하고 연緣을 잊지 못하고 털어내도 떨어질 줄 모르는 저 영.. 시집 분천동 본가입납 2012.07.24
천의무봉 숯부작 천의무봉 숯부작 소나기 흠뻑 뒤집어 쓴 참숯 산 물이 빠져나가자 소리를 지른다 돌이끼 깔고 앉은 풍란 세 그루 키우고 있는 저 산 숯가마 안의 열기에 반드르르 검은 알몸에 물이 닿자 울대를 높이 세우고 골짜기 사이로 물방울을 게워낸다 낟알 터지는 소리 한 순간 물세례를 맞고 깊.. 시집 분천동 본가입납 2012.07.24
(Ⅱ 장자에게 길을 묻다) 장자에게 길을 묻다 장자에게 길을 묻다 창문으로 날아 들어온 두툼한 은행잎 하나 말끔한 얼굴이다 어딘가에 입이 있을 것 같다 바람에 몸을 맡기고 길 없는 공중으로 길을 찾아 두둥실, 반짝이는 아침 햇살 한 배낭 가득 짊어지고 생의 마지막 여행길에 나를 찾는다 저 영혼, 금방이라도 노란 말들을 쏟아.. 시집 분천동 본가입납 2012.07.24
청량산 가문비나무 청량산 가문비나무 백년을 살고 있는 가문비나무 한 그루 뿌리가 뒤엉킨 채 청량산 계곡 비탈에 서 있다 얼마 되지 않은 잎을 걸치고 있는 마른 가지 사이로 무당거미도 올라와 마을을 이룬다 거품벌레나 돌드레곤충에게 몸을 내주고 가려움이 심한 듯 등껍질 비늘이 검붉게 일어나 있다.. 시집 분천동 본가입납 2012.07.24
도솔천 버들치 도솔천 버들치 도솔천 작은 연못 물 한 방울 없이 바짝 마른 꼬마 웅덩이 도솔지에 며칠 동안 비가 내리자 물이 가득 고였다 풀들이 발을 담근다 모처럼만에 무화과 그늘도 내려앉는다 가만히 들여다보니 뭔가 움직이고 있다 버들치 그림자다 그늘을 헤엄쳐 다니는 버들치가 투명하다 환.. 시집 분천동 본가입납 2012.07.24
하나, 또 더 하나 하나, 또 더 하나 암컷 황점호리병벌 한 마리 백목련 나뭇잎 뒤에 진흙 주머니를 만들고 있다 오리 알보다 크다 숨길 것이 있는 듯 힐끗 쳐다보다 말고 입가에 묘한 웃음을 흘린다 호리병벌 아랫배 호리병 주머니가 터질 듯 팽팽하다 딴 주머니를 찬다는 것이 어디 그리 쉬운 일이겠는가 .. 시집 분천동 본가입납 2012.07.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