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명 詩 138

해무

해무 방파제에 서면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닐 때가 있는데 바다도 그런 것이어서 우주도 슬플 때가 있어 흘린 눈물이 바다라든지 별들이 뿌리고 간 설움이 응고된 것이라서 바다는 때로 슬픔의 덩어리가 되는데 어둠을 뚫고 그물을 건지러 나가는 배의 창에 눈물이 되어 흐르고 어스름 저녁 호미 날에 비치는 설움으로 돌아오는 것이다 몇 두름의 고기를 낡은 그물에 던져주는 것이다 백사장에 홀로 서 있던 여자가 벗어놓고 간 어둠이 스며들어 그날 밤은 달이 바다에 빠져 허우적거렸다 안개는 부풀어 오르기만 하는데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기사문에도 여름은 가고 삶은 그저 대수롭지 않게 물결에 쓸려 둥둥 떠다니는 가재도구처럼 바다를 배회한다 구절초가 피고 배추밭 기슭이 물결로 출렁인다 어둠의 관절이 삐꺽거리며 물속에서 여..

이명 詩 2021.06.06

강각에서의 하룻밤

강각에서의 하룻밤 어스름 저녁 강각에 올라 보니 맨 먼저 바람이 얼굴을 스치고 지나갔다 감촉이 부드러웠다 누군가 볼에 손을 대고 다가오는 것 같았다 물소리가 들려오고 그것은 어쩌면 흥얼거리는 어부가漁父歌 같았다 노을 가득한 하늘로 구름이 흐르고 있었다 누군가 노를 젓고 누군가 색동옷을 입고 춤추는 것 같았다 귀를 막고 두 손으로 귀를 막고 분어행盆魚行* 시를 지으며 얼마나 피하고 싶은 어지러운 세상이었겠는가 그때가 귀거래 귀거래하며 얼마나 그리워했겠는가 늙은 부모 계시는 고향집을 얼마나 아름답고 깊이가 있었겠는가 유구한 산천이 또 얼마나 즐거웠겠는가 강물에 잔을 띄워 술 마시며 노래하는 삶이 바위는 귀가 먹지 않았다 * 농암聾巖 이현보가 퇴계退溪 이황 형제에게 지어 보낸 장문의 시로서 그 당시 관료들을 ..

이명 詩 2021.04.01

법거량식으로

법거량식으로 백두대간을 넘어온 문자 몇 올에 도시의 삶이 묻어있다 이유 없이 우울하고 정체 모를 고독에 잠 못 이루고 무작정 어딘가로 떠나고 싶다는 그러나 그 숨결, 여기서는 향기가 되나니 이 산중에서 가난한 내가 답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수평선 타고 번지는 노을과 검정 보자기에 수북이 쌓여 빛나는 별과 까마득히 밀려오는 파도를 수레국화 꽃물 흐르는 밭과 함께 창공 가득 채워 오롯이 보내드릴 수밖에 시인정신 2021년 봄호

이명 詩 2021.04.01

곤줄박이 코드

곤줄박이 코드 왜 굳이 이 조그만 산중 집에 현판이 있어야 한다고 했는지 명필가에게 부탁해 그 두터운 나무로 제작해 보내왔는지 이덕무의 한시 족자 한 편쯤이야 들고 오지 않아도 될 일을 오겠다고 약속해 둔 날을 한 달이나 앞당겨 성하지 못한 몸으로 그 멀리서 단숨에 달려왔는지 돌아가서는 무엇이 급해 바로 숨을 거두었는지 가는 길 배웅하고 돌아와 보니 새 한 마리 현판 아래 누워있다 방파제를 넘은 파도가 비로소 절망한다 시인정신 2021년 봄호

이명 詩 2021.04.01

가리비의 비행

가리비의 비행 그물에 들었어 여행은 삶을 풍요롭게 만들지 태어난다는 것이 기적이고 삶이 신화일 테지만 모래 속을 파고드는 일상이 지겹다 느껴질 무렵 가볍게 날아올랐어 트랩이라 생각하며 어디까지 날아갈지 모르지만 비상의 시간이야 신은 있다고 믿으니까 그 물속으로 행운이 찾아온 거지 직성이 풀렸다고나 할까 언젠가 신선들 그림에서 봐둔 남극노인성을 찾아갈 거야 머리 꼭대기가 위로 솟은 노인 말이야 그렇다고 장수할 생각은 없어 행운이 있을 거야 신앙은 누구에게나 있는 거니까 길을 찾아 떠나는 거지 그물 밖으로 애지 2021년 봄호

이명 詩 2021.02.21

마늘밭에서

마늘밭에서 마늘종을 뽑으면 대궁에서 천둥소리가 난다 잘린 꽃대 끝에서 폭포수가 쏟아진다 장미가 피어나 밭 둘레가 온통 흐드러지게 붉은 이 계절에 힘차게 밀어올린 꿈을 송두리째 빼앗기는 저 마음이야 내 영혼이 허탈한 것은 나의 청춘은 이미 충분히 끝나 후줄근해서라지만 거세당한 황소처럼 몸서리치며 흐느끼는 저 마음이야 그 마음 아랑곳없이 여자는 마늘종은 제때 뽑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네 문학과 창작 2020년 여름호

이명 詩 2020.06.04

도시와 달팽이

도시와 달팽이 너는 네모 어디에서나 네모 울타리를 만들고 지붕을 만들고 거리를 만들고 하늘 높이 모서리를 세워두고 끊임없이 분열하고 어느 것으로도 규정지어지지 않는 실타래처럼 엉켜 자유를 허용하지도 않는 네모는 집이 될 수 없어 바랑을 지고 길을 나서는데 지하도를 건너고 모서리를 돌아 중림, 저기까지 가는데 발바닥이 갈라질까 평발을 가진 나는, 각진 그늘 바람이 훑고 다니는 모서리를 피해 뿔을 세운다 둥글게 선을 그린다 문학과 창작 2020년 여름호

이명 詩 2020.06.04

기사문을 아시는지

기사문을 아시는지 삼팔선 북쪽 포구, 출항이 해제된 시각 바다로 나온 어부는 캄캄 어둠 속 불을 밝힌다 부두에서 점등된 불은 바다로 나가 별이 되고 어부는 성자가 되고 흐르는 것은 아픔이라서 물속에서도 별은 그리움이 될까만 그물을 내리고 부표들을 올리며 성자들은 별의 조도를 높인다 동방호 동일호 명복호 성동호 성신호 영광호 청복호 희영호 광어좌 방어좌 문어좌 가리비좌 뭇별들의 이름을 호명하며 창가에 기대 아스라이 별의 위치를 점쳐본다 어둠의 농도는 어디서나 같아서 굳이 먼 바다로 나가지 않아도 되는 별은 근해에서 빛나서 좋구나 별마다의 사연이 신화가 되어 흐르는 저 하늘 속으로 이미 유성이 되어 떠난 사람들을 생각하며 한 됫박의 어둠을 마신다 동이 트면 서퍼들이 사라진 별을 찾아 물결을 넘는 자네, 밤마..

이명 詩 2020.03.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