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 가을에는 붉게 물들고 싶다
이명 | 시인
또 다시 가을이다. 곧 나무들은 옷을 갈아입을 것이다. 그리고 잎들은 서서히 떠날 준비를 하고 있을 것이다. 곧 있을 작별이 서러운 듯 밤새 나뭇잎에도 이슬이 촉촉이 맺혀 있다. 큰 나무든 작은 나무든 새벽녘 잎에는 물기가 가득하다.
잎을 떠나보내며 나무는 또 하나의 연륜을 더 하고 줄기에는 주름 하나가 더 잡히고 껍질은 더 퍼석해 질 것이다. 나무도 그럴진대 하물며 한 해가 곧 저문다는 것을 육감적으로 느끼고 있는 인간에게서야 연륜이 더해가는 감정을 그저 덤덤하게 바라보고만 있고 그냥 곱게만 받아넘길 수가 있겠는가.
누구는 쓸쓸히 누군가는 심한 아픔으로 또 누군가는 즐겁게 바람처럼 이 한 계절을 보낼 것이다.
민용태 시인은 읊었다. 시인은 <문학과창작> 가을호 최근작 ‘거울’에서 ‘나의 늙어가는 얼굴을 제일 참지 못하는 건/거울이다, 거울은 늘 차겁고 딱딱한 어투로/빤히 나를 쳐다보며, 날마다 나의/여윈 볼을 꼬집고 주름을 못질한다고 했다가 소나무가 나를 보고에서는 소나무가 나를 보고 나이는/들수록 멋이 드는 법이라고 한다//애송이 잣나무에는 잣도 젖도 안 나오고/젖이 나오기로 하면 큰 젖소가 젖이 철철 넘치고/소가 늙고 늙어 소나무가 되면/한 백년은 살아야/온몸의 주름이며 껍질 문양이 제법 격조를 띄운다’고 했다.
세월이 빚어준 흔적 하나를 보면서 참지 못하다가도 이내 돌아서서 그것은 오래된 것일수록 그리고 푹 삭혀진 것일수록 깊고 은은한 격조 높은 향기가 나는 것으로 승화했다. 사실 아름답고 고운 연륜에서는 깊고 그윽한 향기가 난다. 누군가 말했다지 않은가 어떤 젊은이에게 노인이 이야기하기를, “야, 너는 늙어 봤느냐? 나는 젊어 봤다”고 하는 말. 그 말이 주는 울림을 느낄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천 년 묵은 나무 아래는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모여 들지 않는가. 밑동에 주름져 색 바랜 껍질이 군데군데 터져 있지만 얼마 남지 않은 잎을 하늘에 맡기며 유유자적 손을 흔들고 있음을 보지 않았는가. 그 그늘로 모여든 사람들은 모두가 거기서 가볍게 한 삶을 토로하고 돌아서지 않는가.
언젠가 들은 이야기지만 노인이 산을 오르는데 젊은이 한 무리가 우르르 뛰어 올라가는 것을 보면서 참 좋을 때다고 혼자서 중얼거리며 힘겹게 산 정상에 올라가니까 천 년 묵은 주목이 뚜벅뚜벅 올라오는 노인을 바라보며 참 좋을 때다고 했다한다.
사실인지는 몰라도 이 세상에서 가장 오래 산다는 나무가 바오밥나무라고 한다. 6000년 묵은 바오밥나무가 아프리카에 있다는데 그 나무가 노인을 봤다면 뭐라 하겠는가. 아마 참 귀엽다 정도로 표현해도 될 지. 나무들이 이 세상의 주인이라고 한 글이 새삼 기억난다.
이 가을에 나도 한 그루 나무가 되어 저 들녘에 서고 싶다. 휘휘 늘어진 공작단풍나무처럼 나도 붉게 물들고 싶다.
[불교신문 2758호/ 10월12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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