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여름 밤의 기억
이명 / 시인
대학 다닐 때의 일이다. 여름방학이 되면 친구들은 산이다 바다다 삼삼오오 캠핑을 떠나는 계획에 들떠 설쳐대던 시절. 나는 여름방학만 되면 책을 한 배낭 가득 짊어지고 백부님이 계시는 큰집으로 갔다. 거기는 조용하기도 해서 책 읽기와 내 뿌리를 엿볼 수 있는 일석이조의 기쁨을 얻을 수 있어서 방학이면 다른 잡생각 없이 아예 큰집으로 향했다. 큰집은 종택이어서 내가 거처하는 데는 전혀 지장이 없었다.
밤에는 백부님 곁에서 자고 아침이면 서원에 나가 홀로 책을 읽었다. 저녁이면 백부님과의 대화가 흥미로웠다. 백부님은 유학과 한학을 독학하신 분으로 이 방면에 도통하셨고 지방은 물론 중앙에서까지 알아주는 대가셨지만 대쪽 같은 성품에 어디 나서길 싫어하는 그야말로 청청한 기품의 명품 선비셨다. 대종가를 지키는 종손으로서의 품위를 결코 잃지 않았다.
뜻 있는 대학교수들이 줄줄이 찾아와 배움을 청하고 서로 요일을 정해 놓고 정기적으로 학습을 하기도 했다. 중국과 대만 정부에서까지 초청을 받을 정도였으니까 유학과 한학으로는 가히 세계적이랄 수도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그러나 어린 아이처럼 모든 사물에 대한 호기심이 대단하셨다. 라디오에서는 어떻게 소리가 나며 달나라까지 어떻게 사람이 왕복해서 갔다 올 수 있는지 별이며 우주며 지구과학에 대해 몇 날 밤을 이야기 하곤 했다. 나와의 대화는 끝없이 이어졌고 현대과학을 신비해 하셨다.
아주 무더운 여름 어느 하루였다. 오전10시경이었다고 기억한다. 그 날도 평소처럼 아침을 먹고 서원에서 홀로 책을 보고 있었다. 갑자기 서원 대문 열리는 소리가 삐꺽 들렸다. 이 시간에 올 사람이라고는 없는데 하며 내의 차림으로 내다보았다. 양복에 넥타이까지 맨 중년 신사가 서원마당으로 들어서서 사방을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버스 도착 시간도 아닌 이아침에 그리고 이 무더위에 검정 양복이라니 나는 급히 옷을 입고 서원 강당으로 나갔다. 내가 방에 있었던 것을 미처 몰랐던 그 사람도 다소 놀라는 눈치였다. 다짜고짜 마루로 올라온 그가 하는 말이 강 건너 마을에 처녀귀신이 있는데 그를 만나러 왔다는 것이다. 자기는 며칠 전 백두산에서 자고 그저께는 한라산에서 잤는데 충청도가 집이라며 본인이 귀신이라 했다.
나는 소름이 끼쳤지만 워낙 차림새가 단정하고 말씨도 고분고분하고 이 대명천지에 귀신이라니 오히려 호기심이 발동했다. 강 건너 한옥 집을 가르쳐 주고 올라가기 전에 꼭 서원에 들려 처녀귀신 상봉 이야기를 들려주고 올라가라고 신신당부 했다. 그도 그렇게 하겠다 하고 사라졌다. 오후 내내 기다렸지만 그는 오지 않았다.
백부님께 여쭤보니까 예전에 그 집에 모종의 사건이 있었다 했다. 대감이 여종을 건드려 안방마님이 대청마루 밑으로 피신한 여종을 죽였다는 말이 전해오고 있기는 하다는 말을 들었다. 그 일 후 까닭 모르게 그 집은 폐가가 되었다 한다. 그 수수께끼의 신사는 아직도 생생한 모습으로 남아 있다. 때 이른 무더위에 생각나는 기억의 한 편린이다.
[불교신문 2731호/ 6월29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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