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서 봄이 가벼운가 보다
이 명 / 시인
나는 여행을 좋아 한다. 계획 없이 무턱대고 떠나는 여행을 더욱 즐긴다. 지난 해 연말 눈이 내린다는 일기예보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잘 되었다 싶어 공항에 전화를 했다. 비행기가 뜬다는 것이었다. 제주도 여행 일정을 계획했던 사람들이 눈과 바람 예보 때문에 취소했을 거라는 내 예측이 적중했다. 과연 제주도는 바람이 거셌다. 파도가 몰아치고 앞을 보고 걸을 수가 없었다. 저녁에는 눈도 내렸다. 저녁을 서귀포에서 먹고 중문으로 이동하는데 폭설이 내렸다.
숙소에 거의 다 왔을 무렵 언덕길에 차들이 엉켜 있는 것이 보였다. 중앙선을 넘어 겨우 내 차선으로 들어왔는데 차가 미끄러져 내렸다. 도저히 그냥을 갈 수 없을 것 같아 내려 모래를 뿌리고 차를 갓길로 몰아 상가 불빛 가에 차를 정차시키고 스노체인을 꺼내 펼쳤다. 어둠과 추위와 눈보라와 싸우며 힘겹게 체인을 감으려는데 잘 되지 않았다.
슈퍼에 들어가 이 사람 저 사람에게 물어도 잘 모르겠단다. 할 수 없이 바쁜 주인에게 물어 보니 손님에게 양해를 구하고 선뜻 가르쳐 주는 것이 아닌가. 얼마나 고맙고 미안하던지, 그대로 들고 나와 달아보는데 폭설은 내리고 잘 되지 않는다. 제주도 12월 기상관측 이래 최고의 눈이라는 뉴스가 흘러 나왔다. 눈은 하염없이 내리는데 체인을 감는 일은 쉽지 않았다.
양손을 앞바퀴 안쪽으로 넣고 고개를 숙여 끙끙 대는데 웬 총각이 다가와 자기가 하겠단다. 그 동네에 사는 사람인 듯 일행은 눈을 맞으며 옆에 서 있었다. 얼마나 내가 딱해 보였는지 술 냄새도 약간 풍기는 듯 했는데 서슴없이 무릎을 꿇고 체인을 감아 댔다. 고무 끈 매는 방법까지 일일이 설명을 해 주면서 손쉽게 후딱 해 치워 버린다. 물어보니 군에서 수송병과를 해서 이런 것은 식은 죽 먹기란다. 그러고 보니 최고의 전문가를 만났다 그는 일을 끝내고는 내 인사도 받는 둥 마는 둥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오히려 여행 잘 하고 가시라며 일행과 함께 뒤돌아 손을 흔들며 큰 소리로 인사를 한다.
추위는 사라지고 오랜만에 느껴보는 정말로 따뜻한 밤이었다. 그들의 앞날이 복되기를 기원하며 나도 누구에게 그런 사람이었는지 누구의 기억 속에 그런 사람으로 남을 수 있기를 다짐해 보며 황홀한 밤을 보냈다. 그 다음날도 눈은 내렸다. 그냥 앉아 있기가 무엇해서 체인을 감은 차를 끌고 들판으로 나왔다. 들녘은 온통 눈으로 덮였다. 추사 유배지로 향하는데 푸른 잎들이 보였다. 이 엄동설한에 채소가 자라다니 끈질긴 생명력이었다.
워낙 채소나 풀꽃 등에 대해 아는 것이 없는 터라 물어보니 봄똥이란다. 얼떨결에 튀어 나온 말 “예? 봄도 똥을 누나요?” 말을 내뱉고 보니 나도 웃음이 나왔다 그러고 보니 납작하게 땅에 붙어 있다. 펀펀하다. 짙은 초록색이다. 냄새는 나지 않지만 저들도 부끄러운 모양이다 눈으로 덮어두고 있는 것을 보니. 나는 세월이 왜 그렇게 빨리 가고 한 해가 왜 그렇게 후딱 가버리는지 제주도에서 보았다. 엄동설한에 속을 비운 몸이 가볍지 않겠는가. 그래서 봄이 가벼운가 보다. 올 한 해도 가볍게 날아갈 것이다. 달착지근한 맛이 또 변비에 좋다고 하니 내 몸도 가벼워질 것이다.
[불교신문 2703호/ 3월16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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