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몸에는 바다색 피가 흐른다
이명 / 시인
한 때 나는 낚시 광이었다. 남해를 누비며 어부처럼 돌아다녔다. 그러나 그 숱한 날들에도 수확은 별로 없었다. 돔을 잡으러 나선 길이었지만 그 흔한 감성돔 한 마리 낚아 올리지 못했다. 떠날 때는 마음이 한껏 부풀었지만 돌아올 땐 허전했다. 파도치고 안개 자욱한 형제섬에서 53cm짜리 참돔 한 마리와 65cm 내외의 방어 두 마리를 잡은 것이 전부였고 그것을 마지막으로 낚싯대를 놓아야 했다.
푸랭이와 소리도에서 위험한 사고를 두 번이나 겪었기 때문이었다. 그 날들을 생각하면 지금도 가슴이 뛴다. 떠날 때는 내 눈 앞에 미끈한 대어 한 마리가 아른거리고 나는 그를 안고 춤을 추는 꿈에 잠겼다. 집을 빠져나갈 때마다 황홀경에 빠져 가는 길을 재촉했다. 돌아올 때는 허전함과 피로 뿐이었다. 그러나 그와 더불어 내 속을 채워주고 있는 것이 있었다. 바다와 숲과 바위들이 내 속으로 들어와 일주일 내내 출렁거렸다. 대어의 자리를 출렁이는 바다가 대신 채워 주고 있었다.
대어는 한낱 꿈이었을 뿐이었고 허상이었다는 것을 알기까지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는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자연이 옆에 있고 그 바다나 섬들의 청청한 역사가 바로 눈앞에 보이는데 어찌 찌가 눈에 들어왔겠는가. 귀양지가 가까이 있음을 알리며 묵묵히 서 있는 관탈도. 호송관도 그 때까지는 죄수가 관복을 입고 있도록 여유를 보였을 것이지만 관탈도를 지나며 죄수복으로 갈아입도록 했다는 섬 관탈도. 관탈도는 여전히 엄한 모습으로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그 섬에서 나는 눈앞의 바다를 응시하며 추사를 생각했다. 그리고 그 앞을 지나갔을 수많은 선조들을 생각했다. 이런 저런 이유로 관직을 박탈당하고 머나먼 제주로 귀양을 떠나며 그리고 멀리 제주 섬을 바라보며 의관을 벗었을 저 바다, 그곳이 저기 저 자리쯤이 아니었을까. 온갖 상상을 하며 조선의 선비들을 생각했다. 모항도 밤바다에서는 찌가 보일 리가 없었다.
처녀귀신이 머리를 풀고 나를 덮쳤고 나중에 안 일이었지만 인광이 온갖 형상을 하며 희뜩번뜩 내게로 달려들었다. 소름끼친 그 밤에 나는 낚시도 팽개치고 민박집으로 줄행랑을 쳤다. 내 뒷모습을 보며 고기들이 박장대소를 하며 낄낄거리지 않았겠는가. 그 소리가 들리는 듯 했다. 어찌됐건 바다는 나를 가만 두지 않았다. 때로는 엄숙함으로 위엄을 보이기도 하고 때로는 다정함으로 놀아주기도 하고 내가 다가갈 때마다 그는 늘 내게 친근감을 보였다. 형형색색으로 그 속을 보여 주었다.
그로부터 살생은 내게서 아예 멀어져 갔고 나는 바다와 화해하고자 노력했다. 내가 손짓하자 바다는 그 몸을 돌돌 말아 구르며 달려왔다. 내가 발을 내밀자 바다는 내 발을 적셔주었다. 서 있으나 누워 있으나 내 속에서는 바닷물이 출렁거렸다. 그 후 병원에서 피를 뽑는데 피 색깔이 검푸른 바다색이었다. 대롱 속에서 바다가 소용돌이치며 출렁거리고 있었다. 내 몸 속에 바다가 흐르고 있었다.
[불교신문 2721호/ 5월25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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