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남준의 로봇 K-456 앞에서
리모컨을 켜자 그 여자는 가슴에 달린 전등을 번쩍이며
노래하고 춤추고 걸으며
딱딱 끊어지는 쉰 목소리로 인사를 하며
몇 번씩이나 눈을 껌뻑였다
누군가 생각날 듯 생각날 듯했지만
끝내 이름이 떠오르지 않았다
리모컨을 끄자
그 여자의 속이 텅 빈 사각형 얼굴에서
볼품없이 툭 튀어나온 유방에서
푸른빛이 감도는 은빛 철골에서
등뼈와 팔다리에서
머리 위로 날리는 은박지에서
누군가 생각날 듯 생각날 듯했지만
끝내 이름이 떠오르지 않았다
내가 서 있는 곳이 그리스의 신전인가
이집트의 피라미드인가
외계의 어느 별나라인가
내 아버지의 아버지의 아버지의 무덤인가
그 무수한 경계를 헤매다가
불현듯 깨어났다 시계를 보았지만
초침은 정지돼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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