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집 앵무새 학당

백남준의 로봇 K-456 앞에서

분천 2013. 9. 27. 17:31

백남준의 로봇 K-456 앞에서

 

 

 

리모컨을 켜자 그 여자는 가슴에 달린 전등을 번쩍이며

노래하고 춤추고 걸으며

딱딱 끊어지는 쉰 목소리로 인사를 하며

몇 번씩이나 눈을 껌뻑였다

누군가 생각날 듯 생각날 듯했지만

끝내 이름이 떠오르지 않았다

 

리모컨을 끄자

그 여자의 속이 텅 빈 사각형 얼굴에서

볼품없이 툭 튀어나온 유방에서

푸른빛이 감도는 은빛 철골에서

등뼈와 팔다리에서

머리 위로 날리는 은박지에서

누군가 생각날 듯 생각날 듯했지만

끝내 이름이 떠오르지 않았다

 

내가 서 있는 곳이 그리스의 신전인가

이집트의 피라미드인가

외계의 어느 별나라인가

내 아버지의 아버지의 아버지의 무덤인가

그 무수한 경계를 헤매다가

불현듯 깨어났다 시계를 보았지만

초침은 정지돼 있었다.

'시집 앵무새 학당' 카테고리의 다른 글

메콩 강과 한강 사이  (0) 2013.09.27
바벰바족의 율법  (0) 2013.09.27
블랙 스완  (0) 2013.09.27
사하라 헬스클럽 모래시계  (0) 2013.09.27
산을 검색중이다  (0) 2013.09.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