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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말을 해도 웃었고
누군가 장난을 걸어도
웃기만 했다
준비물은 어느 것도
챙겨오지 않았다
선생님의 꾸중을 듣거나
매를 맞아도 웃기만 했다
눈에 보이는 것 보다
보이지 않는 것이
훨씬 더 많은 바위 같은 아이
얼마 전 고구마를 수확하고 들깨를 거둬들였다. 몸은 힘들어도 마음만은 풍성하다. 나라에서 웃음이나 미소가 사라진 요즈음 1년 내내 집집마다 태극기가 펄럭이는
바닷가 마을에는 미소가 여기저기 널려있다. 바람이 세차게 불어서 그런지 오늘은 태극기가 유난히도 환하게 펄럭인다. 어려운 때일수록 힘을 내라는 것인가 밝고 힘차다.
스산한 바람이 불고 잎들이 지고 있지만 코스모스는 희망처럼 아직도 몇 개의 꽃을 피워내고 있다. 꽃은 흔들리고 흔들리는 하얀 꽃에서 조금은 쓸쓸한 미소를 본다.
어판장을 지나는데 기울어진 시멘트기둥에 가오리가 몇 마리 걸려있다. 가오리는 햇살을 받으며 말라가고 있다. 무심코 지나쳐 해변으로 가다 문득 가던 길을 멈추고
돌아보니 가오리가 웃고 있다. 해풍을 맞으며 바짝 말라가고 있던 가오리가 웃고 있다.
갑자기 초등학교 시절 내 짝이 생각났다. 바짝 마른 내 짝은 하루 종일 웃기만 하고 말이 없었다. 친구들이 놀려도, 선생님이 호되게 혼을 내도 웃기만 했었다.
점심 도시락은 싸 오는 날이 없었다. 점심은 아예 굶었다. 그러나 그 시간에도 도시락을 싸 오지 않은 여느 아이처럼 밖에 나가지도 않고 자리에 앉아 있었다.
나는 고추장 하나 달랑 들어 있는 도시락을 흔들어 비벼 그에게 주곤 했다. 그는 처음에는 먹지도 않았다. 웃으며 안 먹는다고 했다. 괜찮다고 했다. 먹지도 않고
밖에 나가지도 않고 점심시간 내내 자리에 우두커니 앉아 있었다. 말을 걸어도 대답은 하지 않고 웃기만 했다. 어느 동네에 사는지 물어도 집도 가르쳐주지 않았다.
그런 그가 궁금해 학교가 파한 어느 날 그의 뒤를 미행했다. 그는 들길을 지나 마을 끝 외딴 곳으로 한없이 걸어 들어갔다. 그는 내가 따라오는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아랑곳하지 않고 앞만 보고 갔다. 나는 멀찌감치 떨어져서 그를 따라 갔다. 황량한 들판, 폭격에 쓰러진 기둥 몇 개가 보였다. 그 중 비스듬히 기울어진 넓적한 기둥
하나에 거적이 둘러쳐져 있었고 그는 그 거적을 들고 안으로 사라졌다. 거적을 들추었을 때 얼핏 깡마른 남자가 정좌를 하고 앉아 있는 것이 보였다. 새카만 얼굴에
눈빛이 빛났다. 그의 아버지 같았다. 나는 곧바로 가던 길을 되돌아 왔다. 종종 걸음으로 오다 말고 돌아서서 한참을 바라보았다. 내 눈이 의심스러워 다시 가서 모른 척
친구의 이름을 불러보았지만 안에서는 어떤 움직임도 소리도 없었다. 누구 하나 나와 보는 사람이 없었다.
도시락을 나눠줘도 먹지 않는 그를 잘 알기에 명절에 몇 가지 음식을 몰래 싸들고 그의 집을 찾았다. 아무리 불러도 대답이 없었다. 나는 음식들을 거적 앞에 두고 그저
힘없이 발길을 돌렸다. 그런 그지만 학교는 하루도 빠지지 않았다. 무슨 말을 해도 웃었고 누군가 짓궂은 장난을 걸어도 웃기만 했다. 준비물은 어느 것도 챙겨오지
않았다. 선생님의 꾸중을 듣거나 매를 맞아도 웃기만 했다. 눈에 보이는 것 보다 보이지 않는 것이 훨씬 더 많은 바위 같은 아이, 기울어진 시멘트 기둥에서 말라가는
가오리의 미소가 그랬다.
부다가야 보리수 아래 정좌를 하고 앉아 있는 수도승처럼 깡마른 구릿빛 모습. 그 미소, 언뜻 부처를 닮아있다. 바라보니 빛이 쏟아져 나온다. 보면 볼수록 오묘한 빛,
더없이 황홀하다. 어수선한 이때 생각은 깊어만 가고 태극기 마을 해변은 등이 굽어 있었다.
[불교신문3251호/2016년11월23일자]
이명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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