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평

잉크보다는 생명의 피

분천 2021. 3. 3. 08:22

잉크보다는 생명의 피

 

김춘식 | 평론가 · 동국대 국문과 교수

 

 

1. 서정시의 시적 실감과 환각

 

이명 시인의 신작 시집 ?기사문을 아시나요?는 시인이 특정한 ‘장소’와 교감하고 그것을 시로 써내는 과정을 잘 보여주고 있는 시집이다. 물론 이 시집에 실린 시 전편이 모두 어떤 특정한 장소의 의미를 탐구하는데 온전히 바쳐지고 있다는 뜻에서 하는 말은 아니다. 단지, ‘시’라는 것이 ‘대상’에 대한 성찰과정에서 시인 스스로의 ‘내면’을 들여다보고 자연스럽게 삶의 태도를 성찰하는 경우가 많다는 점에서 이 시집을 통해 ‘장소감’이라는 것이 시 창작과정에 미치는 영향을 자연스럽게 살펴볼 수 있다는 점을 주목하기 위해서 하는 말이다. 기사문은 양양의 해안가 항구인데, 사실 이 시편에는 기사문에 대한 자세한 정보나 풍경에 대한 세세한 묘사가 드러나 있지는 않다.
오래전 백석이 기행 시편을 쓸 때, 사물에 대한 묘사보다는 그 지역의 인정과 풍속을 주목해서 바라보았듯이, 이 시집에서 시인은 언제나 사람과 자연, 그리고 스쳐 지나가는 풍광의 느낌을 보여주는 데 열중한다. 실제로 이 시집에 실린 시편들의 배경은 ‘기사문’ 뿐만 아니라 남대천 등 양양군 일대의 많은 ‘장소 체험’이 녹아 들어가 있다고 추측된다. 그럼에도 구체적인 지명이 많이 나타나지 않은 이유는, 시인이 자신의 몸으로 스쳐 지나간 많은 다른 장소들 역시 시 안에서 동시에 서로 혼재되어서 새로운 시적 장소를 만들어 내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체험의 장소와 시적 여정이 만들어 내는 ‘공간’은 이 점에서 차이가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시 속의 장소는 일종의 현실에 대한 ‘알레고리’이고 시 안에서 실제의 지명을 밝히더라도 ‘그 장소’는 실제의 장소라기보다는 이미 새로운 ‘아우라’를 덮어쓴 가상의 ‘공간’이나 ‘장소’가 되는 것이다.
이명 시인의 ‘기사문’은 이 점에서 온전히 ‘이명’이라는 시인의 고유한 장소이고 시 속의 화자가 온전히 자신의 몸속에 각인시킨 ‘육화’된 장소이다. 예를 들면, 이번 시편에 나타나는 ‘자연’의 모습은 모두 시인의 ‘상상’이나 ‘정서’의 옷을 입은 것으로, 기억이나 ‘자아의 돌아보기’가 동반되지 않은 상태에서 단순하게 묘사된 것이 아니라, 시인의 환상 속에서 ‘재구성’되고 ‘만들어진’ 것이다. 시인의 개성은 모두에게 ‘동일한’, ‘공통된’ 장소를 시로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시인과 소통된 혹은 교감된 대상만을 시로 쓴다는 점에서, 시 속의 장소는 최종적으로는 시인의 ‘내면’을 비추는 ‘거울’이 되는 것이다.
이명 시인의 시적 화자는 ‘서정적 진술’을 직접적으로 발화하는 ‘고백적 진술’을 주로 보여주는데, 이로 인해 시는 전체적으로 난해하기보다는 ‘평온한 정서’를 바탕으로 가볍게 말을 거는 방식으로 독자에게 다가간다. 이 점은 이 시에 녹아 있는 장소의 느낌을 독자에게 전달하기에는 상당히 효과적인 것으로 보인다.
이 시집에 실린 「증강현실」이라는 작품은 사실 제목과는 다른 역설을 담고 있다. ‘환상’을 현실에 흡사할 정도로 가상공간에 구현하는 것이 ‘증강현실’이지만, 시적 환상은 이와는 반대로 ‘현실’에 환상의 옷을 입히는 것이다. 환상에 현실감을 부여하는 것(증강현실)과 현실에 ‘환각’을 돌려주는 것(시적 상상)은 분명 서로 반대되는 행위이다. 그러나 ‘현실’로 하여금 ‘환상’을 끌어안고 그 환상을 ‘체험 가능한 것’으로 만든다는 점에서 시가 ‘실감’, ‘증강현실’을 속성으로 하는 것은 분명하다.
현실의 영역에 ‘환각의 마법’을 투사하는 것과 ‘환각’을 육체적인 체험의 영역으로 끌어들이는 ‘증강현실’은 지금까지의 ‘실제적 체험’을 왜곡하는 것이면서 동시에 그 체험의 ‘상징적 질서’를 혼란시키는 행위이다. 다만 증강현실의 판타지가 ‘현실감’을 필요로 한다면, 시적 환상은 ‘현실감’에 대해 ‘환각이나 완강한 상징질서로부터의 탈피’를 요구하고 있는 점이 차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시의 ‘증강현실’은 이 점에서 현실감의 확대가 아니라 ‘현실감의 균열 또는 분산’을 보여준다.

 

내가 산이었을 때 그대는 바위였고 나무였을 때 새였다 바다였을 때 바람이었고 배였을 때 물결이었다 먼 바다로 나갔을 때 돛대에 앉아 항로를 지켜주는 갈매기였다 집은 사라지고 소실점 하나 수평선에서 빛났다 어둠이었을 때 별이었다 벌나무는 헐벗고 동지는 다가오고 낙엽 흩날리는 산중에 비스듬히 서 있는 밤나무 가지 사이로 바람이 불어가고 있었다 바다를 몰고 사막을 건너는 바람이었다 나를 지우는 바람이었다
― 「증강현실」 전문

 

사실 서정시의 문법으로 보면 이 시의 ‘환각’은 오히려 많이 익숙한 것이다. 불교적인 인연설이나 무상성無常性을 빌려오지 않더라도 시적 환상은 ‘현실의 물리적 시공간성이나 그 인과성’을 종종 초월한다. 그리고 그런 ‘초월성’ 속에서 산, 나무, 바위, 새, 바다, 바람 등의 육화된 사물들이 마법적인 생명을 되찾아서 새로운 ‘현실감’을 구축해 내는 것이다. 서정시의 낡은 문법처럼 보이지만, 결코 쉽게 ‘낡아서 상투적인 것’이 될 것 같지 않은 이런 상상의 유희는 ‘견고한 이성의 성채’ 밖에서 자유로운 상상의 마법을 펼친다는 점에서, 체험의 시공간적 질서를 단순히 교란하는 것만이 아니라 ‘물질적 삶’으로부터 ‘영혼’의 구원을 도모하는 오래된 방법이다.
“시는 영혼’의 승화나 구제”라는 신념은 언제나 서정시의 견고한 이념 속에 깃들어 있다. 시적 환상이나 상상은 인간의 체험, 시공간의 기억을 변형시켜 새로운 ‘스토리텔링’으로 만드는 힘이면서 만물과 소통하거나 교감하고 심지어는 스스로 다른 ‘사물’로 변신하거나 ‘전신轉身’하는 능력의 원천이다. 이명 시인의 시는 ‘환상’과 ‘서정’의 유희를 넘어서 그것을 삶에 대한 성찰로 종종 이끌어 내는데, 이런 사유는 ‘유희’에서 ‘깨달음’으로 자연스럽게 연결되는 그의 시적 특징이기도 하다.
인용한 시에서 ‘바람’의 상징성은 ‘무상’, ‘무형’에 있을 것이다. 고정되지 않고 형체도 없기 때문에 ‘그대’는 ‘바위’, ‘나무’, ‘새’였다가 결국은 나를 지우고 나와의 경계가 완전히 사라지는 존재가 되는 것이다. 인간의 시공간적 감각은 언제나 ‘대상’과 ‘인식’의 구별 속에서 발생한다. ‘나’와 ‘너’의 구별됨, 그 항상성이 ‘나’와 ‘너’의 상대적 위치 변화로, 또 다른 대상으로의 거듭된 ‘만남’으로, 반복되는 과정 속에서 결국 ‘나와 너’는 지워진다. ‘경계 없음’의 경지는 사실 그 자체로 높은 것이 아니라, 그것에 대한 체험이나 각성의 환희를 ‘좀처럼’ 실감하기 어렵다는 점에 있을 것이다. ‘시적 실감’의 의미나 가치는 이렇듯, 이런 불가능해 보이는 ‘초월적인 것의 체험’에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시 속에서는 역설적이지만 ‘생각보다는 아주 단순한’ 체험이다. ‘시적 실감’이 ‘증강’, ‘현실’인 이유는 그야말로 ‘현실적 감각’의 경계를 ‘무화’시키기 때문이다.


2. 신화적 회귀와 ‘기사문’이라는 장소

 

이명 시인의 시집에서 ‘기사문’은 생활의 공간이면서 동시에 그 생활과 삶의 이면이 ‘살아 숨 쉬는’ 신화적 장소다.

 

캄캄한 밤 기사문 선장들은 신이다
별의 이름을 갖는다
가깝고 먼 바다에 별 하나씩 띄워두고
통발을 걷고 그물을 걷는다
수면은 경계가 되고
경계 위로 별빛 따라 줄줄이 올라오는 몸들
제석천의 그물에 걸려 우리는 경계를 넘어서고
보이는 그물이나 보이지 않는 그물이나
희미한 별빛 아래 펼쳐져 있다는 것은 마찬가지
신들이 있고 반야용선이 있다는 것은 마찬가지
아침마다 기사문 부두는 수미산이 되고
깍두기 머리를 한 신이나
파마머리를 한 여신이나
한 섹터를 관장하기는 마찬가지
분주하게 드나드는 자망 통발 정치망 배들
운명을 다한 영혼들을 안내하는데
모든 길은 하늘로 열려 있어
밤하늘의 별이나 바다의 별이나
멀고 그립고 아름답고 아득하기는 마찬가지
별밤을 기다린다

― 「마찬가지」 전문

 

이 시의 배경인 기사문항은 밤새 통발 어선들이 불을 켜고 ‘바다의 생명들’을 낡아 올리면 아침마다 부두에서 ‘깍두기 머리’, ‘파마머리’의 일꾼들이 분주히 일을 하는 곳이다. 시인은 이런 현실적 장소에 신화적 스토리를 덧붙인다. ‘캄캄한 밤’ ‘별이 되는 기사문 선장들의 배와 그 별을 관리하는 신’이 등장하면 이제 기사문 전체는 ‘신화적 장소’, ‘신들의 장소’로 변한다. 그저 일상적인 풍경일 수도 있는 ‘장면’에 ‘신화적 상상’이 개입되면서 ‘삶’은 어딘가 신성한 ‘아우라’를 품기 시작한다.
사람들이나 배들의 바쁜 움직임은 어느덧 ‘인간의 삶과 운명’을 관장하는 신들의 분주함과 겹치고 밤하늘의 별들은 인간의 운명이라는 그물을 길게 드리운 ‘반야용선’이 된다. 어쩌면 신화는 이렇게 ‘일상적 삶’ 속에서 언제나 되풀이 되고 있는 것이다. 제석천의 그물에 인간들의 운명과 생사가 줄줄이 연결되어 있듯이, 바다의 생명들도 그저 ‘죽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새롭게 ‘신화적 공간’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사실, 통발 어선에 의해 줄줄이 끌려오는 생명은 모두 ‘죽음’으로 생을 마칠 것들이다. 이렇듯 ‘운명을 다한 영혼’들은 ‘죽음’의 절대적 ‘종결’을 떠올린다면 생명의 허무나 비극적 장면을 연상시키기에 충분한 것들이다. 그러나 이 시에서 ‘기사문’은 그런 죽음의 장소가 아니라 ‘새로운 삶의 활기’로 넘치는 장소다. ‘운명을 다한 것들을 어디론가 인도하는 분주한 신’들이 넘쳐나는 곳, 기사문이 그런 장소가 됨으로써 시인은 어느덧 ‘삶의 무상함이나 허무함’을 스스로 초월해 낸다.
죽음과 삶은 이 점에서 ‘마찬가지’인 것이다. 모두가 저마다의 운명을 살다가듯이, 운명을 다한 것들은 ‘멀고 그리운’ 밤하늘의 별들에게로 돌아가는 것이다. 삶이란, 이렇듯 ‘사실’의 문제보다는 상상과 믿음이 만드는 세계에 대한 ‘그리움’이 남아 있을 때 더 풍요로워지는 것이기도 하다.
“오 신이여, 각자에게 자기 자신의 죽음을 주소서, 각자 사랑과 의미와 비탄을 만났던 삶, 진정 그 삶에서 연유되는 죽음을 주소서”라는 릴케의 말을 떠올려 보자. 어쩌면 이 시의 기사문은 ‘죽음이 의미의 결핍 속에서 두려움이나 공포가 되는’ 그런 삶을 구제해 내는 공간이다. 죽음이 두려운 것은 결국 ‘의미의 결핍이자 영원한 무지에 대한 공포’ 때문이다. 결국, ‘충만한 죽음’이란, 과거 신화 세계 속의 ‘영웅’이나 ‘전사들’이 스스로 죽어서 하늘의 별이 된다는 신념을 절대로 의심하지 않았기 때문에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듯이, 혼돈 상태에 놓인 ‘죽음’이나 ‘운명’을 다시 ‘충만한 의미’로 채워주는 것에 다름이 아니다.
이명 시인의 ‘기사문’이라는 장소는 이 시집 전체의 ‘시적 알레고리’로도 읽힌다. 물론, 이번 신작 시집에는 ‘기사문’이라는 장소 이외에 시인이 몸으로 부딪쳐온 다른 많은 사물과 장소, 인물들이 등장한다. 그러나 이러한 사물과 장소, 인물은 모두 각기 다른 ‘다양한 것들’임에도 모두 시인의 ‘성숙함’에 대한 생각과 열망이 투영되어 있다는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 ‘기사문’이라는 장소가 이번 시집을 관통하는 하나의 ‘알레고리’가 될 수 있다고 한 것은 이런 사실에 근거한다.
‘기사문’이라는 현실적 장소를 ‘충만한 의미를 지닌 시적 장소’로 변화시켰듯이, 이 시집의 소재나 배경은 전체적으로 시인의 ‘성숙’ 또는 ‘충만에 대한 열망’을 공통적으로 암시한다. 생의 완성은 분명 ‘충만한 죽음’에 대한 열망일 수 있으며, 그것은 허무나 비극으로부터 ‘죽음’과 ‘삶’을 구제해 내고자 하는 욕망이다. ‘성숙’ 또는 ‘완성’은 죽음을 절대적 종결이 아닌 ‘우주적 회귀’의 과정으로 만드는 일이다. 불교적인 깨달음‘이든 진리의 현현과 자각에 대한 체험이든 ’우주적 회귀와 순환‘의 한 과정에 대한 믿음과 깨우침은 시적으로는 ’순간성과 영원성‘의 분별이 사라지는 체험이기도 하다.


3. 침묵과 울림에 대해

아포리즘을 담은 다음의 시는 수사나 이미지 또는 시적 기교를 동원하지 않은 단형의 작품이다. 단순함 안에 아포리즘적인 역설을 담았다는 점에서 이 시의 화법을 ‘침묵의 화법’에 비유해 볼 수 있다.

 

침묵하더라도
누가 두드리거든 드높은 가을 하늘이 되거라

소리 내지 않아도
노을에 우러나는 서러움이 되거라

네 스스로 뜨거움이 되거라
― 「종에게」 전문

 

종소리는 ‘종’의 속성이고 ‘종’의 한계조건에 해당된다. ‘종’이 침묵한다면 그건 종으로서의 속성을 이미 잃은 것이다. 그러나 종이 ‘초월’을 말하는 기표가 되려면 ‘종소리’를 ‘뛰어넘는’ ‘침묵의 소리’를 만들어 낼 수 있어야 한다. 침묵하고 소리 내지 않고 ‘종’이 되는 것. ‘침묵’은 이 점에서 단순히 ‘소리를 내지 않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침묵하고 소리 내지 않아도’ 울림을 만드는 것. 종은 분명 소리를 내지만 소리가 종의 본질적 속성은 아닌 것이다. ‘울림’을 만들어 내지만 소리는 없어지는 단계. ‘소리’가 아닌 ‘울림’이 되어야 종은 완성된다 할 수 있을 것이다. 즉, ‘침묵의 소리’는 ‘울림’만이 남은 상태를 의미한다.
‘가을 하늘’도 되고 ‘노을에 우러나는 서러움’도 되고 스스로 뜨거워질 수도 있는 것, 이것이 ‘침묵의 소리’가 가진 다변성이다. 울림은 하나의 중심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나와 너’의 경계가 사라지듯이 섞이고 공명하는 것이다. ‘울림’은 이 점에서 하나의 중심에서 흘러나오는 소리가 아니라 ‘너와 나’의 침묵이 만나서 섞이는 파동 같은 것이 아닐까. ‘성숙’이나 ‘충만’은 이 점에서 단순한 개체의 완성을 말하는 수사는 아닐 것이다.
이명 시인의 시 속에서 ‘성숙’에 대한 열망이 ‘개체’와 ‘개체’의 섞임이나 공명으로 나타나는 장면은 이 점에서 각별히 의미 있게 보인다.

 

작년에 수확해 창고에 널어놓은 마늘을 깝니다
수북이 쌓여있는 마늘을 보며
처음에는 엄두가 나지 않았습니다만
신문지 깔아두고 흙 묻은 껍질을 수도하듯 벗깁니다
산중 외딴집 거실에 홀로 쪼그리고 앉아 마늘을 깐다는 것이
당신은 청승맞다 생각하시겠지만
껍질을 까며 나도 누더기처럼 펄럭이는 껍질을 벗습니다
얼마나 벗어야 알맹이가 나올지
고라니는 울고 밖은 너무나 캄캄해서
내 껍질의 두께는 가늠조차 할 수 없습니다
삶은 내 몸의 껍질을 조금씩 벗겨가는 일이라는 것을
이제는 알 것만 같은 밤입니다
언젠가 늦게 들어오던 날 밤 거실에서
홀로 마늘을 까고 있던 아내의 모습이 기억납니다
어느덧 손목에 힘이 빠져
이젠 더 이상 벗어버릴 껍질조차 없는 아내는 주말이면 오고
그때마다 나는 읍내로 마중을 나갑니다
창밖에서 소리 없이 별은 빛나고 어둠은 깊어지고
이 어둠도 벗기다 보면 언젠가는 밝아지겠지요
별을 헤듯 쌓여있는 마늘을 까며 나도 껍질을 벗습니다
― 「마늘」 전문

마늘을 까는 화자의 행위는 일상의 ‘노동’에 해당하지만 이 시에서 ‘마늘 까기’는 노동의 의미보다는 ‘수도’의 의미에 가깝다. 다시 말해서, 그냥 살아간다는 것 그것 자체가 ‘수도’인데, 평생 그것을 모르고 반평생을 살아왔다는 함의를 지니고 있는 것이다.
앞에서의 ‘공명’이나 ‘울림’과 견주어 보면, ‘마늘 까기’는 노동이지만 이미 노동이 아닐 때, 비로소 ‘충만함’에 닿게 된다. 그리고 그 충만함을 매개로 ‘나는 스스로의 껍질을 벗고’, ‘아내’와 함께 공명하거나 ‘울림’을 만들 수 있는 것이다.
이명 시인의 시를 화려한 형식이나 시적 형식 자체의 자기 완결성에 치중하는 작품이라고 보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그의 시에는 서정시의 본질에 닿아 있는 ‘충만함’, 그리고 ‘진정성’과 ‘이해의 시선’이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이 점은 시인으로서의 그의 ‘품성’이나 ‘자질’과 관련된 것일 수도 있을 듯하다. 언어나 예술성도 중요하지만, 시가 어떻게 삶속에 깊이, 충만하게 관여할 수 있는가를 고민하지 않는다면, 시적 구원은 영원히 불가능할 것이다.
삶의 구제란 결국 스스로 충만한 존재들로 모든 ‘존재들’을 되돌려 놓는 데에 있다. 시는 “잉크보다는 생명의 피에 가까워야 한다.” 모든 작품은 시인의 손을 떠나 독자의 것이 되지만 시인이 만든 울림은 언제나 그 시 속에 남는 것이다. 시인의 ‘진정성’이나 ‘충만함에 대한 열망’은 잉크 속에 깃든 생명의 피처럼 ‘부재하는 힘’이나 ‘아우라’ 같은 것이라고 생각한다. 시인으로서의 품성이나 자질을 닦는 일이 삶의 완성을 요구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는 점은 이 시집의 ‘중요한 메시지’ 중 하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