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평

바다가 보이는 언덕에서 부르는 귀거래사

분천 2022. 8. 12. 09:58

바다가 보이는 언덕에서 부르는 귀거래사

 

이승하(시인, 중앙대 문창과 교수)

 

 

  현대화는 도시화의 다른 말이다. 5천 년 농경사회의 근간이 흔들린 것은 일제강점기 때인 1920~30년대이다. 이때부터 조선은 근대화의 물결을 타게 된다. 경성에 모던뽀이와 모던걸이 등장하고 다방이 생겨나고 파마를 할 수 있는 미장원이 생겨난다. 전차가 시내에 다닌다. 박정희 대통령이 부르짖은 것이 재건과 경제개발 5개년계획과 공업 입국이었다. 두레나 품앗이 같은 농경사회의 미덕들은 하루아침에 뒷전이 되고 전국 곳곳에 ‘공단’이 생겨났다. 공돌이로 불리던 이들이 산업역군으로 존경을 받게 되었고, 중동 건설 붐을 타고 뜨거운 사막에 가서 많은 사람이 노동을 하고 돌아와 가게를 차렸다. 1980년대에 마침내 전국 거의 모든 사업장에 노조가 생겨 노사분규가 중요한 뉴스로 등장하게 된다. 농경사회를 유지하는 것은 대가족제도인데 공업사회를 유지하는 것은 교통수단과 판매이익이다. 우리 사회는 물류ㆍ유통ㆍ효율ㆍ투자ㆍ환율ㆍ금리ㆍ금융 등이 이슈가 되었고, 지금은 인공지능의 시대가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런 시대에 도시를 떠나 바다가 보이는 언덕으로 이사 간 시인이 있으니 그의 이름은 이명이다. 산중거사 내지는 해변의 길손이 된 지 어언 7년, 시인의 귀거래사가 바로 이번에 내는 시집 ?산중의 달?이다.

  도연명이 365년에 태어나 427년에 죽었으니 동진(東晉) 말기부터 남조(南朝)의 송 초기에 걸쳐 생존했던 시인이다. 팽택(彭澤)이란 곳에서 현령을 지내다가 41세 때 사퇴하고 시골로 들어가서 20여 년을 은둔해 살았다. 도연명 작이 확실한 것이 4언시 9수, 5언시 115수, 산문 11편이니 작품의 수가 적지 않다. 240자로 된 「귀거래사」는 노장사상의 영향을 바탕으로 해 전원생활에서 느끼는 자유와 평안을 노래한 시다. 입신과 양명에 눈이 멀어 권력에 아부하고 금권을 좇아 타락하는 관료사회에 대한 염증에 대한 반작용으로, 전원에서 자연을 접하는 아름다움과 자연의 섭리에 따라 살아가는 기쁨을 잘 표현하고 있다. 이명의 제7시집인 이번 시집을 읽기 전에 시인이 쓴 수필을 먼저 읽어보았다.

 

  내가 있는 산 중턱 아랫마을은 주로 바다에서 일을 하는 사람들이 사는 작은 어촌 마을이다. 마을과 떨어진 이곳에 몇 년 살다 보니 선장과 가까이 지낸다. 이들이 산중에 있는 나를 생각하는 마음은 때로 상상을 초월할 때가 있다. 어느 날 새벽에 바다 나갔다 돌아와 부두에서 그물 일을 하던 최 선장에게서 전화가 왔다. 닭장을 다 지었느냐고 한다. 지금 짓고 있는데 며칠 좀 걸리겠다고 하니 그럼 안 되겠네 한다. 무슨 일이냐고 하니까 누군가 아는 사람이 키우라고 부두로 중닭 세 마리를 가져다 놓았는데 집이 안 됐다니 안 되겠다는 것이다. 그럼 어차피 가져오려면 바다 일 끝난 오후가 될 터이니 그때까지 울타리와 집을 지어 놓겠다고 하고 오후에 가져오라 했다.

 

  2018년 9월호 ?좋은 수필?에 발표한 이런 글을 보면 이명 시인이 ‘고독한 산책자’임을 알 수 있다. 사람이 아닌 닭을 벗삼아 살아가게 되었으니 적적하기도 하고 무료하기도 할 것이다. 하지만 낮에는 작물을 가꾸는 노동의 일과를 보내고 밤이면 책 읽고 시 쓸 터이니 적적하지도 않고 무료하지도 않을지 모른다.

  도대체 왜 시인은 사람들이 서울로 서울로 가려고 하고 그도 아니면 경기도에서 살려고 하는데 도시를 등지고 바다가 멀지 않은 산 중턱으로 간 것일까. 그 이유 또한 수필을 통해 확인해 보고자 한다. ?선수필? 2018년 여름호에 발표한 「허술한 왕국」의 일부다.

 

  오랜 전통의 인도 브라만교는 옛날부터 인생을 4단계로 구분하고 있는데 이것을 아슈라마라 했다. 이들은 이를 일종의 종교적 의무처럼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이 관습에 따르면 삶을 4단계로 나누는데 범행기(梵行期), 가주기(家住期), 임서기(林棲期), 유행기(流行期)로 구분한다. 범행기(梵行期)는 태어나서 25세까지의 청년기를 말하며 학문을 공부하고 세상을 배우는(카-마) 학습 시기를 말하고 가주기(家住期)는 26세부터 50세까지 장년기를 말하며 재산을 모아 가정을 이뤄 식솔을 부양하고(아르타) 사회적 의무를 다하는 시기를 말한다. 임서기(林棲期)는 51세부터 75세까지 노년기를 말하며 집을 떠나 산으로 은둔하여 명상의 생활을 하며(다르마) 자신의 영혼을 정화하고 구원하는 시기라는 것이다. 유행기(流行期)는 유랑기(流浪期)라고도 하는데, 이는 76세 이후 졸년을 말하며 무소유의 경지에서 속세를 초탈하는(모크샤) 시기라고 한다.

 

  물론 시인은 브라만교를 믿는 사람은 아닐 테지만 이런 식의 인생 설계에 공감한 것이 틀림없다. 이명 시인은 도시를 등진 그 당시를 “어느 정도 사회적 의무를 다하고 자식들도 다 키웠으니 이제 집을 떠나 자신의 영혼을 정화하고 구원하는 시기”라고 보고 어중간한 전원생활이 아니라 칩거에 가까운 은둔생활을 하기로 마음먹은 것이다. 도심에서 좀 떨어져 있는 교외의 전원주택 정도가 아니라 마을과도 꽤 떨어져 있는 한촌인가 보다, ‘동해서실 명련재’라는 곳은.

  해설자가 즐겨 보는 TV 프로 중에 ‘나는 자연인이다’라는 것이 있다. 이 프로를 좋아하는 이유는 당연히, 은둔자로 살아가는 그들의 삶이 부럽기 때문이다. 그러나 부러워만 할 뿐, 실행할 엄두를 내지 못한다. 자연에서의 생활력이 0점이기 때문이다. 이명의 시 가운데 도시를 공간 배경으로 한 시가 없지 않다.

 

바람이 심하게 불던 날 밤 덜컹, 출입문이 열리더니

쓰레기봉투 하나 날아들었다

얼핏 보기에 어느 곳에서

유용하게 쓰이던 시절이 있었을 것만 같아 보였는데

서부역 주변에 오래 머문 탓에 가볍다

대로변을 날아다니는 것은 불법이므로 당직은 수갑을 채웠다

그리고 바로 묻는다

이름이 뭐냐고

어디서 무엇을 하며 살아왔느냐고

무슨 죄를 짓고 날아다니느냐고

그냥 죽게 내버려 둘 수는 없다며 내력을 캐는 데 열중이다

—「중림동 파출소」 부분

 

  도시란 이런 곳이다. 인간이 쓰레기 취급을 받고, 길에는 쓰레기가 바람에 날리고 굴러다닌다. 도시는 또 어떤 사람이 죄를 짓고 어떤 사람이 그 죄를 캐내는 곳이다. 큰 죄를 지은 사람과 작은 죄를 지은 사람이 훌 섞여 사는 곳이다. 파출소의 당직은 “정의 사회 구현을 위해” 조사를 받는 이에게 이름을 다시 한번 정중히 묻는데, 수갑을 찬 사람은 “쓰레기라니까요”라고 대답한다. 세상이 이토록 거칠고 살벌하다.

 

사당역 뒤 골목길

술 취하면 길바닥에 눕는 사람

그는 전생에 몽골 초원 출신일지도 모른다

바이칼 호수 구릉에 누워 어린 시절을 보냈거나

정복자의 칼을 휘두르며 달리다 사막 어디에나 누웠을

그렇게 구름을 보고 하늘을 보고 별을 보았던 습관이

그를 눕게 하는지도 모른다

눈빛이 사막 같아서

바람은 모래알처럼 모였다 흩어지고

별들이 쏟아지고

줄지어 달려오는 차량들은 어둠 속 한 무리의 기마병

사람들은 물결처럼 흘러갔다

—「황제의 귀환」 부분

 

  이런 사람이 도시에 어디 한두 명인가. 이런 취객을 노리는 ‘퍽치기’라는 이들도 있다. 러시아워 때의 인파와 차량 행렬, 별을 못 보게 하는 매연, 황사와 미세먼지……. 별들이 쏟아지고 있는 곳은 도시가 아니다. “줄지어 달려오는 차량들은 어둠 속 한 무리의 기마병”이고, 사람들은 물결처럼 흘러가는 곳, 바로 거대한 도시다. 제목은 역설이다. 실은 황제가 아니라 귀가하지 못한 취객이다. 시인은 그를 “이제는 와불”이라고 표현했다. 대로는 야단법석이고, “말발굽 소리 까마득한 곳에서 별이” 빛나니 시인은 이 시끌벅적한 도시를 마침내 떠나기로 마음먹은 것이다.

  스스로 자연으로 들어가 자연인으로 살아가는 시인 이명의 귀거래사를 이제부터 한 편 한 편 살펴보고자 한다.

 

한밤중 잠결에 무슨 소리가 들려

다락으로 올라가 보니

뻐꾸기창에 달이 걸려 달그락거리고 있네요

방으로 들어오려다 창에 걸렸나 봐요

달빛 쏟아져 흥건하고

어둠이 놀라 달아난 자리, 환하네요

다람쥐 쳇바퀴 돌듯

일그러졌다 살아났다 다니는 길로만 다니더니

일상이 지루한가 봐요

그저께는 바다에 빠져 허우적거리더니

일탈은 아무나 하나요

내친김에 푸르게 기화하고 있어요

—「산중의 달」 전문

 

  이 고즈넉한 세상에는 창에 걸린 달과 나밖에 없다. 달이 그저께에는 바다에 빠져 허우적거리더니 지금은 푸르게 기화(氣化)하고 있다. 도시에서 보는 달과 산중의 달이 이렇게 다르다. 이 시에서 가장 의미심장한 행은 “일탈은 아무나 하나요”이다. 아무나 자연인이 되는 것이 아니다. 이제 해무(海霧)를 보자.

 

방파제에 서면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닐 때가 있는데

바다도 그런 것이어서

우주도 슬플 때가 있어 흘린 눈물이 바다라든지

별들이 뿌리고 간 설움이 응고된 것이라서

바다는 때로 슬픔의 덩어리가 되는데

어둠을 뚫고

그물을 건지러 나가는 배의 창에 눈물이 되어 흐르고

어스름 저녁 호미 날에 비치는 설움으로 돌아오는 것이다

몇 두름의 고기를 낡은 그물에 던져주는 것이다

백사장에 홀로 서 있던 여자가 벗어놓고 간 어둠이 스며들어

그날 밤은 달이 바다에 빠져 허우적거렸다

—「해무」 부분

 

  시인이 은둔하는 동안 만난 것은 바다의 ‘슬픔’이다. “그물을 건지러 나가는 배의 창에 눈물이 되어 흐르고/ 어스름 저녁 호미 날에 비치는 설움으로 돌아오는 것”이 시인이 본 바다이다. “몇 두름의 고기를 낡은 그물에 던져주는 것”이 바다이다. 산중의 달이 이제는 바다에 빠져 허우적거린다. “바다는 무덤”이기도 하다. 어마어마하게 많은 생명체가 태어나는 곳이 바다이고 그 생명체의 무덤이 또한 바다이다. 나는 “그저 대수롭지 않게/ 물결에 쓸려 둥둥 떠다니는 가재도구처럼 바다를 배회”하고 있다.

  도시에 살면 수많은 사람을 만나게 되고 스쳐 지나가게 되지만 다 남이다. 같은 아파트에 살아도 남이고 지하철을 같은 시간에 같은 차량에 타도 다 남이다. 그런데 자연에서 만나는 생명체들의 삶은 다 우리 속의 삶이다. 우리(cage) 속의 우리(we)인 것이다.

 

삶은 무덤처럼 자라나 무성했다

땀이 비 오듯 쏟아지고 나무는 쓰러지고 허수아비 같았다

그 숲속에서 가난했네

어둠으로 통하는 길에 오로라가 춤을 추고 있었네

꽃향기를 이기지 못하여 늘어지는 자미화처럼 흔들렸네

모든 숲은 사랑으로 통하고

그 숲속에서 죽음 말고 무엇을 더 요구하겠는가

길은 숲으로 잠기고 똬리를 튼 길이 살아 꿈틀거렸네

—「서종을 지나며」 부분

 

  서종은 양평군 서종면인가? 문명의 때가 덜 묻은 곳에서의 삶이 그래도 무덤 위의 잡풀처럼 자라나 무성하다는 표현이 재미있다. “모든 숲은 사랑으로 통하고”는 이 시집을 관통하는 문장이다. 생명은 사랑이고 사랑은 생명이다. 물론 생명의 끝은 죽음이지만 일정 수가 죽어야 또 다른 생명이 살아갈 수 있다. 시인의 생명의식은 우주 만물이 영원회귀의 법칙에 의해 움직인다고 말해준다. 겨울 가면 봄 오고, 달이 차면 기운다. 낙엽이 거름이 되고 시체가 먹이가 된다.

 

삶은 뿔뿔이 흩어지는 떠남의 연속이라고

태양이 어둠을 던져놓고 사라진

환한 적멸 그늘 아래

한 장의 티켓을 받아 들고 나는 막차를 기다리고 있다

솜털은 날리고 바람은 불고

빈터 어디에도 발바닥의 지문은 보이지 않는다

 

씨앗들이 떠날 채비를 하고 줄기 끝에 서 있다

—「터미널」 부분

 

  어디 먼 곳에 가기 위해 반드시 가야 할 곳이 터미널이다. 인간만 목적지가 있는 것이 아니다. 씨앗들이 떠날 채비를 하고 줄기 끝에 서 있는 것도 한 장의 티켓을 받아 들고 막차를 기다리는 사람과 마찬가지 상황이다. 새로운 세계를 향해 가려는 생명체의 갈망을 도시에 살 때는 잘 몰랐는데 이제 비로소 알게 되었다. 그래서 “나는 이제 산중으로 들어와 꽃의 속삭임을 듣는다”(「꽃의 변신」)고 말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리고 “잠 못 이루는 풀들이 파랗게 돋아나는 길 위에서/ 밤새 그들의 묵시록을 읽는”(「달팽이」) 경지에 드디어 이른 것이다. 참으로 「귀거래사」에 부합하는 시가 있으니 아래의 시다.

 

  산중에 살아 보니 나무도 골반을 가졌다 가지들은 치장을 하고 신발을 신고 다녔다 슬하에는 자식들이 자랐다 어린 싹들은 눈빛이 빛났다 벌레들이 다녀가고 딱따구리는 굳은 등줄기에 안마를 하고 꾀꼬리는 우듬지를 떠나지 않았다 손님들의 방문에 생기가 돌았고 봉분은 평화로웠다 아침마다 해가 맑은 얼굴로 인사를 하고 매미가 하루의 피로를 풀어주었다 삶이란 어판장의 경매처럼 흘러갔으므로 옹이투성이 나무, 말없이 바다를 내려다보고 있다

—「산중에 살아 보니」 전문

 

  산중에는 수많은 종의 나무와 꽃, 곤충과 짐승이 산다. 때로 그곳에는 인간의 무덤도 있지만 땅은 사실 수만 년 전부터 서식한 뭇 생명체의 무덤이 아닌가. 지금 살아 있는 딱따구리와 꾀꼬리, 벌레와 매미가 다 이 숲은 주인공이요 주인이다. “삶이란 어판장의 경매처럼 흘러가는 것”이지만 “옹이투성이 나무”는 아무 “말없이 바다를 내려다보고 있”는 것이다. 살아 있는 한 사는 것이며, 살아 있는 한 죽어가는 것이다. 죽음에 대한 명확한 인식은 삶에 대한 인식을 더욱더 새롭게 한다.

  이제 최 선장이 등장하는 시편을 보자. 그는 바다에서 살생하며 살아가는 사람이다. 하지만 그 살생이 식구들을 먹여 살리니 생과 사는 도대체 무엇이 다른가. 이승과 저승의 경계는 어디인가. 우주의 안은 어디이고 밖은 어디인가.

 

최 선장이 들고 온 대구 한 마리

건조망 속에 넣어 처마 밑에 걸어 놓으니

문상객들이 모여든다

검푸른 정장 차림에 빛나는 몸들

고개 숙이며 합장하고 있는가 하면

몸을 웅크려 멍하게 바라보기도 하고

두 손을 연신 비비며 기도하는 듯한

형태는 가지가지

부고는 없었는데 어떻게 알고 찾아왔는지

산중 어깨들이 모두 모였다

—「풍장」 부분

 

  최 선장이 큰 대구를 한 마리 잡았나 보다. 사람들이 대구를 문상하러 온 것이 아니라 먹으러 온 것일 게다. 대구는 억울하게(?) 죽었지만 인간의 입장에서 보면 온몸으로 인간을 위해 육보시하는 것이다. 시편 중 상당수가 불교적 세계관으로 쓴 것이 아닌가 하는데, 불교사상의 핵심은 공사상, 윤회설, 인연설이다. 삶은 참 헛되지만 정진하면 업에서 벗어나 해탈할 수 있다는 것이고, 생사에서 벗어나는 것이 업장 소멸이다. 신의 가호 덕분이 아닌 스스로 용맹정진하여 택하는 것이 열반의 경지다.

 

기사문 가는 길은 멀고도 험하다

지나온 세월들을 출렁이는 모래 속에 묻어두고

최 선장 따라나서는 길

세상은 몇 겹의 포장으로 싸여 있는지

조명등 불빛이 별빛인 줄 알았는데

그물 너머 세상에도 별이 있구나

밤마다 별을 보며 그리움을 키웠는데

방파제 돌아 어판장에 오르면

미륵 세상은 있는 것인지

문어도 올라와 있네

대구도 있고 광어도 보이네

눈빛이 선하네

모두 장화를 신고 몰려다니네

손짓이 어수선하네

여기가 정말 극락인지

저마다 사는 것이 힘들다 하네

—「참가자미」 전문

 

  어판장은 어부들이 잡아 온 생선이 판매되는 곳이다. 수많은 생선이 해부학 교실의 시체처럼 도열해 있지만 한편으로 이곳은 삶의 역동성이 느껴지는 곳이다. 참 얼마나 아이러니한 일인가. 시인이 도시에서 살 때는 생과 사의 운명에 대해 그렇게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을지 모른다. 죽음은 부고장 속에서 혹은 TV 화면 속에서 일어나는 일이었다. 그런데 자연의 품 안에서 살다 보니 생명체들이 각자 생과 사의 현장에서 불꽃 튀는 싸움을 전개하고 있는 광경을 보게 되었다. 그래서 이명의 시는 도연명의 「귀거래사」와는 차원이 좀 다르다. 차량이 물결을 이루고 있는 도시보다 더욱더 치열한 삶의 현장이 바다이고 산이다. 약육강식과 적자생존의 현장이다. 하지만 자신에게 부여된 생명력을 마음껏 발산하는 곳이기도 하다. 이명의 시에는 술과 함께 하는 안빈낙도가 있다. 벗과 함께 하는 유유자적이 있다. 자연 속에서의 물아일체가 있다.

 

귀를 막고

두 손으로 귀를 막고

분어행(盆魚行) 시를 지으며

얼마나 피하고 싶은 어지러운 세상이었겠는가 그때가

귀거래 귀거래하며

얼마나 그리워했겠는가 늙은 부모 계시는 고향 집을

얼마나 아름답고 깊이가 있었겠는가 유구한 산천이

또 얼마나 즐거웠겠는가

강물에 잔을 띄워 술 마시며 노래하는 삶이

바위는 귀가 먹지 않았다

—「강각에서의 하룻밤」 후반부

 

강각은 농암 이현보 선생의 본가에 있는 건물 두 채 중 하나로, 다른 하나의 이름은 애일당이다. “이 듕에 시름 업스니 어부의 생애로다”로 시작하는 이현보의 「어부사」는 윤선도의 「어부사시사」에 영향을 준 작품이다. 「분어행」은 이현보가 퇴계 이황 형제에게 지어 보낸 장문의 시로서 그 당시 관료들을 어항 속의 물고기에 비유하며 정계 은퇴를 종용한 시라고 한다. 시인은 관광객들에게 유료로 개방하는 강각에서 하룻밤을 묵으며 「분어행」을 지어 퇴계 형제(해(瀣)와 황(滉))에게 보낸 이현보를 생각한다. 이현보는 연산군 때 정6품 정언(正言)으로 있었는데 서연관의 비행을 공박했다가 안동으로 유배된 적이 있었다. 그 뒤 중종반정으로 지평에 복직되어 동부승지와 경상도관찰사, 호조판서 등 여러 벼슬을 했지만 정치에 환멸을 느끼고 낙향, 벼슬길에 오르지 않고 후학들을 키우며 안빈낙도하였다. 시인은 바로 강각에서 하룻밤 지낸 어느 날, 은거 생활을 결심했는지도 모르겠다. 이곳에 와보니 이현보가 늙은 부모 계시는 고향 집을 얼마나 그리워했는지 알 것 같았으리라. 유구한 산천이 얼마나 아름답고 깊이가 있었는가를 알 것 같았으리라. 그리고 강물에 잔을 띄워 술 마시며 노래하는 삶이 얼마나 즐거웠는지 알 것 같았으리라. 나 또한 이제 알겠다, 왜 이명 시인이 도시 생활을 작파하고 동해로 가서 산과 바다를 볼 생각을 했는지를. 산중에서 보는 달은 도시에서 보는 달과 다르다고 시인은 이야기한다. 언제 한 번 그의 농막에 가서 술잔을 기울이고 싶다. 술은 와인보다 막걸리가 좋겠다.

 

이명의 시세계 : 시집  「산중의 달」  해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