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명 詩

푸른 도서관

분천 2019. 6. 26. 07:34

푸른 도서관




이토록 물렁한 도서관을 본 적이 없다

수심 깊은 하조대 바다


쉴 새 없이 두루마리가 펼쳐지고 갈매기 날고

바람이 편집하는 줄글들마다 흰 꽃 피고 꽃 피면 절벽은 환하다

 

물거품 이는 입구는 둥글게 부서지는 만다라

해독하느라 바위들은 머리가 하얗다


연륜 깊은 소나무 한 그루 절벽 위에 좌정한 채

유유자적 두루마리 서첩을 읽고 있다


바람 불면 쉽게 닫히는 문, 열고 들어가는 데는 기술이 필요해

여인은 허리에 납덩이를 두르고

두 발을 앞뒤로 벌리며 뛰어 들어가야 하는, 열람실은 바닥에 있다


그 깊고 어렵다는 서책들을 훑으며 거친 행간을 넘나들며

춤을 추듯 부드럽게

광활한 서가 속을 아무런 난해함도 없이 세밀한 곳까지 유영하는

서간체 행과 행 사이


캄캄하다는 것은 삶이 부여받은 태생적 색깔

자산어보 속 자료들을 낱낱이 채집하며 여인은 좋아라,

더 깊숙이 잠수한다


깊은 벽면에 호흡을 절제해 가며 한 됫박 숨비소리로 밑줄을 긋는

이토록 물렁한 도서관을 본 적이 없다



문예바다 2019년 여름호

'이명 詩' 카테고리의 다른 글

마늘  (0) 2019.08.15
멀고도 아득한  (0) 2019.08.15
마찬가지  (0) 2019.06.14
집 위의 집  (0) 2019.06.14
풀, 날다  (0) 2019.06.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