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명 詩

방산의 빈 의자

분천 2023. 6. 2. 09:07

방산의 빈 의자 

 

 

 

산중에서 꿈꾸듯

북명을 바라보고 있는 의자 하나

원래는 흔들의자*였지만 받침대가 부러져 꼿꼿하다

 

언젠가는 남루한 옷에

끈으로 신발을 발등에 묶은 장자가 앉아

물끄러미 나비를 바라보더니

 

어느 날은 노자가 앉아 서쪽 하늘에 눈길을 주다 갔고

또 다른 날에는

달마가 무심히 구름을 바라보다 사라졌다

내가 보기에 형체를 알 수 없을 때는 아무래도 도깨비다

 

천기를 누설할 수는 없지만 무지개 도둑이라든가

호랑이 장가가는 날이라든가 블랙홀이라든가

누군가 계속 말을 걸어오는 바람에

와인으로 목을 축일 수밖에 없는 의자는

가래가 끓고 다리는 불편해도

이 풍진세상, 끽연 말고는 별 도리가 없다

 

한때의 품격을 간직한 채 시인이라기보다는 철학자,

오늘은 마당가를 지키는 사상가다

바라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 흔들의자 : 방산 박제천 시인이 사용하던 의자

 

 

문학과 창작 2023년 여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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