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등단 : 2011. 1 불교신문 신춘문예 당선
☐ 시집 : <분천동 본가입납>(문학아카데미 2011년 10월),
<앵무새 학당>(문학아카데미 2013년 3월),
<벌레문법>(리토피아 2014년 6월)
<벽암과 놀다>(시인동네 2016년 4월)
<텃골에 와서>(도서출판 지혜 2017년 9월)
<기사문을 아시는지>(현대시학 2020년 10월)
<산중의 달>(현대시 2022년 6월)
<초병에게-e북>(수동예림 2018년 2월시선집 )
<박호순 미장원-시선집>(시선사 2020년 1월)
☐ 수상 : 목포문학상(2013년)
(시인의 말)
혁명의 계절
내가 도시를 버리고 산중으로 들어온 지도 10년이 다 되어 간다. 내가 찾아온 곳은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산중턱이다. 황량한 곳으로 잡풀이 우거지고 늪지대가 있어 잡목이 자라는 곳, 아내는 주변에 산소들이 많아 오지 않겠다고 한 곳이다. 양지 바른 곳에 자리 잡고 앉으니 마음이 푸근했다. 결국 혼자 오기로 마음먹고 작은 집을 짓고 들어왔다. 민가가 떨어진 곳이다 보니 적막하기 이를 데 없었다. 산중이라거나 단독주택이라거나 인적 드문 곳에 있어 본 적이 없는 그야말로 무지막지한 도전이었다.
아랫마을은 바다를 삶의 터전으로 생활하는 어촌 마을이다. 나는 이곳에서 오전에는 다락방에서 보내고 오후에는 텃밭을 가꾸는 재미로 보낸다. 평생 사람들 틈바구니에서 정신없이 보낸 삶은 나라는 것을 잊게 했다 잊어버린 것이 아니라 잃어버렸다고 해야 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이곳에 와서야 비로소 진정 나를 생각하는 여유를 가지게 되었다. 나는 무엇인가. 지금도 마리아나 해구보다 더 깊은 심연을 헤매고 있지만 선승처럼 지내는 삶이 마냥 즐겁다. 사람들은 왜 거기까지 갔느냐고 말을 하지만 풀이며 꽃이며 바람이며 나무며 벌레며 친구 아닌 것이 없고 이들과의 대화 또한 한량없이 즐겁다. 새들이 찾아와 눈을 맞추기도 하고 내가 눈길을 주면 저들도 하늘 끝까지 솟구쳐 오른다. 이들의 수다에 시간가는 줄 모른다. 몇 해를 대충 왔다 갔다 하던 아내도 공기 좋고 산천 좋은 이곳이 좋아 이제는 함께 있다. 이보다 더한 삶의 즐거움이 어디 있겠는가. 칸트는 행복의 조건을 세 가지라고 했다. 할 일이 있고 사랑하는 사람이 있고 희망이 있으면 행복하다고. 더러는 시우들도 찾아오고 고기가 좀 잡히는 날은 최 선장도 고기를 들고 올라와 밥 한 끼 같이 하고 이런저런 멤버들 도시의 삶에 지치면 찾아오고 아이들 왔다 갔다 하고 산중 작은 집은 그래서 늘 배가 부르다. 고대 힌두교 사람들은 재산이 많고 적고 학식이 높고 낮고를 떠나 임서기가 되면 집을 떠나 나를 찾아 유랑하고 황혼기에는 모든 것을 내려놓고 산속 아쉬람으로 홀로 떠난다는데 여기 또한 아쉬람이 아니겠는가. 나는 그렇게 생각하고 지내고 있다.
눈이 내리면 눈 속에 묻혀 몇 날을 보내고 비가 내리면 도랑을 정리하고 물이 제대로 흘러가게 길을 낸다. 계곡은 살아 있어 소리치며 흐른다. 내가 저들의 길을 내주면 저들도 내게 길을 가르쳐 준다. 도시는 이런저런 일들로 어지럽고 시끄럽지만 여기는 고요한 자연의 천국이다. 설중매 지고 산벚나무 화사한 꽃잎도 지고 지금은 연두, 연두가 산중으로 올라오는 일사불란한 군홧발 소리, 산중에 가득하다. 곧 초록으로 물들 것이다. 다락방에 올라 저들의 혁명을 숨죽이며 지켜볼 것이다.
(작품)
카페 노바
바다는 한잔의 커피
부딪쳐서 하얗게 꽃이 되는 해변의 3월은
남색이 어울리겠죠
물결이 반짝이는 것은
새로운 별이 태어난다는 것
당신의 테이블 위 오늘은 아콰마린,
한 잔의 바다와 수선화가 어울리겠죠
초병哨兵에게
고통 없이 자라는 나무가 어디 있겠느냐
인내해야 한다는 것은 힘든 일
삶이란 슬픔의 연속이라서 바다도 멍들어 검고
하늘도 푸른 것이다
외롭지 않는 나무가 어디 있겠느냐
지켜내야 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
햇살도 문틈을 비집고 들어와 아랫목에 자리 잡고
바람이 문풍지를 흔드는 것이다
날이 계속 맑으면 땅은 사막이 된다는데
좋은 날만 있다는 것이 좋은 것만은 아니지 않느냐 청춘아
인내를 배우기 위해
나무도 이 무더위에 푸른 옷을 겹겹이 걸치고
혹한에는 옷을 벗는 것이다
저 굴곡의 벌판에
홀로 말없이 서 있는 것이다
어떤 구차함도 필요 없는 것이다
해무
방파제에 서면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닐 때가 있는데
바다도 그런 것이어서
우주도 슬플 때가 있어 흘린 눈물이 바다라든지
별들이 뿌리고 간 설움이 응고된 것이라서
바다는 때로 슬픔의 덩어리가 되는데
어둠을 뚫고
그물을 건지러 나가는 배의 창에 눈물이 되어 흐르고
어스름 저녁 호미 날에 비치는 설움으로 돌아오는 것이다
몇 두름의 고기를 낡은 그물에 던져주는 것이다
백사장에 홀로 서 있던 여자가 벗어놓고 간 어둠이 스며들어
그날 밤은 달이 바다에 빠져 허우적거렸다
안개는 부풀어 오르기만 하는데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기사문에도 여름은 가고
삶은 그저 대수롭지 않게
물결에 쓸려 둥둥 떠다니는 가재도구처럼 바다를 배회한다
구절초가 피고
배추밭 기슭이 물결로 출렁인다
어둠의 관절이 삐꺽거리며 물속에서 여자가 나오네
파도가 쏟아지네
바다는 무덤, 그대라는 무덤
그리고 나의 함몰
마찬가지
캄캄한 밤 기사문 선장들은 신이다
별의 이름을 갖는다
가깝고 먼 바다에 별 하나씩 띄워두고
통발을 걷고 그물을 걷는다
수면은 경계가 되고
경계 위로 별빛 따라 줄줄이 올라오는 몸들
제석천의 그물에 걸려 우리는 경계를 넘어서고
보이는 그물이나 보이지 않는 그물이나
희미한 별빛 아래 펼쳐져 있다는 것은 마찬가지
신들이 있고 반야용선이 있다는 것은 마찬가지
아침마다 기사문 부두는 수미산이 되고
깍두기 머리를 한 신이나
파마머리를 한 여신이나
한 섹터를 관장하기는 마찬가지
분주하게 드나드는 자망 통발 정치망 배들
운명을 다한 영혼들을 안내하는데
모든 길은 하늘로 열려 있어
밤하늘의 별이나 바다의 별이나
멀고 그립고 아름답고 아득하기는 마찬가지
별밤을 기다린다
푸른 도서관
이토록 물렁한 도서관을 본 적이 없다
수심 깊은 하조대 바다
쉴 새 없이 두루마리가 펼쳐지고 갈매기 날고
바람이 편집하는 줄글들마다 흰 꽃 피고
꽃 피면 절벽은 환하다
물거품 이는 입구는 둥글게 부서지는 만다라
해독하느라 바위들은 머리가 하얗다
연륜 깊은 소나무 한 그루 절벽 위에 좌정한 채
유유자적 두루마리 서첩을 읽고 있다
바람 불면 쉽게 닫히는 문, 열고 들어가는 데는 기술이 필요해
여인은 허리에 납덩이를 두르고
두 발을 앞뒤로 벌리며 뛰어 들어가야 하는,
열람실은 바닥에 있다
그 깊고 어렵다는 서책들을 훑으며 거친 행간을 넘나들며
춤을 추듯 부드럽게 광활한 서가 속을
아무런 난해함도 없이 세밀한 곳까지 유영하는
서간체 행과 행 사이
캄캄하다는 것은 삶이 부여받은 태생적 색깔
자산어보 속 자료들을 낱낱이 채집하며 여인은 좋아라,
더 깊숙이 잠수한다
깊은 벽면에
호흡을 절제해 가며 한 됫박 숨비소리로 밑줄을 긋는
이토록 물렁한 도서관을 본 적이 없다
청옥문학 2024 여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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