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강 무렵

이명 시인
버려야 한다기에
도시를 버리고 과거를 버리고 욕망을 버립니다
소쩍새도 수리부엉이도 고라니도
피를 토하듯 밤마다 속을 비워내는 텃골에서
아내마저 버립니다
아내에게서 아내를 지우니 어머니만 남는
산수보다 더 쉬운 단순한 계산법
아내는 남편의 어머니라는 말이
새삼 기억납니다
어제도 밤늦게까지 아이들과 희희낙락
통화하는 소리를 잠결에 들었습니다
버리는 것이 일상이 되어버린 이곳에
무서리는 내리고
고이 돌려드린 아내는
드디어 고산의 여신으로 피어납니다
깃털처럼 가벼워진 몸으로 산중을 어정거리며
신전이나 지켜야겠습니다
■약력 : 2011년 《불교신문》 신춘문예 당선, 시집으로 『분천동 본가입납』『앵무새 학당』『벌레문법』『벽암과 놀다』『텃골에 와서』『기사문을 아시는지』『산중의 달』e북『초병에게』시선집『박호순미장원』공동 시집『우주의 시간』이 있다. 2013년 〈목포문학상〉 수상
■해설:"아내에게서 아내를 지우니 어머니만 남는/산수보다 더 쉬운 단순한 계산법/아내는 남편의 어머니라는 말이/새삼 기억납니다" 상강 무렵에 시인은 큰 깨달음을 얻은 듯, 아내를 버리고 어머니를 얻다니! 시인이 지금 사는 곳은 도시를 버리고 "소쩍새도 수리부엉이도 고라니도 피를 토하듯 밤마다 속을 비워내는 텃골"에 사는 건 아닌지, 아무튼 도시에서는 느껴보지 못한 서리! 서리 잔뜩 내린 길, 아무도 다녀가지 않는 그 길에 발자국을 찍고 싶다는 어떤 평소의 갈망을 시의 배경을 통해 나는 지금 느끼고 있다. 아내는 나이가 들면 아이들에 대한 모성애가 상고대처럼 피어 건조한 남편을 조금씩 외면하기도 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버리는 것이 일상이 되어버린 이곳"에 머무는 시인은 "무서리는 내리고/고이 돌려드린 아내는/드디어 고산의 여신으로 피어납니다"라고 묘사하고 있으니, 버려서 깃털처럼 가벼워졌으니, 역시 큰 그릇의 시인답다는 생각이 얼핏 든다.-<박윤배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