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 글 365

기사문 엽서

기사문 엽서 김희동기자 승인 2023.08.20 이명 더 이상 도시에서는 할 일이 없었습니다 시멘트벽에는 틈이 생기기 시작했고 그 틈으로 물결이 밀려들어 왔습니다 지붕은 우주로 통해 있었습니다 금이 간 창문이 던스턴 바실리카 스테인드글라스처럼 황홀했습니다만 방바닥은 백사장이 되고 밤마다 파도를 덮고 자는 습관이 버릇처럼 생겨났습니다 병이 깊어 기침마저도 밖으로 솟구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도시에서 당신을 만난 것은 가장 큰 행운이었습니다 다음에 오실 때는 배를 타고 오십시오 생각만큼이나 수심도 깊어 북명의 바다처럼 검을 것입니다 험한 길을 헤치며 오다 보면 당신도 곧, 나보다 더 깊은 바다가 될까 염려됩니다만 오기 전에 문자 한 통 넣어 주십시오 이곳도 사람 사는 데라는 것을 소상히 알려 드리겠습니다 이명..

기사 2023.08.21

[시가 있는 아침] 이명 作 / 전이

원주신문 승인 2023.02.26 20:50 댓글 0 전이(轉移) 이명 마당가 설중매 한 그루 꽃을 피웠을 뿐인데 집이 환하다 봄은 아직 멀었는데 내 마음도 등불 켜놓은 듯 밝다 눈길에 남아 있는 발자국, 기억은 선명한데 가지 사이로 미끄러져 들어가는 다리미 하나 홑청이 펴지고 구겨진 마당이 빳빳해진다 눈 감으면 더욱 뚜렷해지는 집의 풍경 겨우내 헝클어진 내 속도 말끔히 펴진다 온몸이 붉게 물든다 이명 시집 『산중의 달』, 《한국문연》에서 생각을 옮긴다는 것은 마음이 통한다는 것이다. 이명 시인의 시 「전이」는 설중매 한 그루 꽃이 피어 온 집의 모습이 환하게 바뀌고 있는 모습을 전하고 있다. 꽁꽁 얼어붙은 땅에 설중매가 핀다는 것은 곳 봄이 당도한다는 신호이기 때문이다. 그 신호를 기점으로 마음도 봄을..

기사 2023.07.19

짐승이 다 되어갑니다

짐승이 다 되어갑니다 도시에서의 일은 잊은 지 오래입니다 어제는 삵이 내려와 놀다 갔고 족제비도 다녀갔습니다 고라니는 나를 보고도 더 이상 울지 않습니다 매도 나무에 걸터앉아 나를 희롱합니다 밤새 소쩍새, 수리부엉이가 다녀간 무덤에 술을 따르고 나누어 마셨습니다 인사를 나누니 몸도 마음도 한결 가벼워지는군요 달이 뜨면 어둠 속으로 들어갑니다 숲속의 검은 수풀을 헤치며 사라지는 나를 당신은 언뜻 헛것을 보았다 할 수도 있겠지요 새벽마다 산이 내려와 바다에 주둥이를 박고 엎드려 입을 헹구면 바다는 출렁이고 붉게 물들어 갑니다 산도 포식자라는 사실을 귀띔해 드리면 내가 짐승이라는 것을 은연중에 짐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두려워 마세요 여기서 얼마간 지내다 보면 사람이었는지조차 기억나지 않을 테니까요 솔바..

이명 詩 2023.06.02

방산의 빈 의자

방산의 빈 의자 산중에서 꿈꾸듯 북명을 바라보고 있는 의자 하나 원래는 흔들의자*였지만 받침대가 부러져 꼿꼿하다 언젠가는 남루한 옷에 끈으로 신발을 발등에 묶은 장자가 앉아 물끄러미 나비를 바라보더니 어느 날은 노자가 앉아 서쪽 하늘에 눈길을 주다 갔고 또 다른 날에는 달마가 무심히 구름을 바라보다 사라졌다 내가 보기에 형체를 알 수 없을 때는 아무래도 도깨비다 천기를 누설할 수는 없지만 무지개 도둑이라든가 호랑이 장가가는 날이라든가 블랙홀이라든가 누군가 계속 말을 걸어오는 바람에 와인으로 목을 축일 수밖에 없는 의자는 가래가 끓고 다리는 불편해도 이 풍진세상, 끽연 말고는 별 도리가 없다 한때의 품격을 간직한 채 시인이라기보다는 철학자, 오늘은 마당가를 지키는 사상가다 바라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 흔들..

이명 詩 2023.06.02

북부시장

(신작시) 북부시장 / 이명 바다는 블랙홀, 거칠었네 철 지난 해수욕장에 사람은 없었네 아이들이 옷을 벗고 있을 때 나는 이미 바다에 뛰어들고 있었네 갑자기 모래 웅덩이에 빠져 파도 속으로 빨려들어 갔네 까마득히 한 여자가 광주리를 흔들며 백사장을 두드리고 있는 것이 보였네 나는 전마선처럼 떠가고 있었네 죽음은 가벼운 것이었네 누군가 나를 끌고 나왔네 백사장에 늘어져 복어는 아니었지만 복어 같았네 시장에서 시장이 걸어 나오네 아침마다 할머니들이 산나물 몇 묶음과 생선 몇 마리 앞에 두고 앉아 있었네 지전 몇 잎 들고 어머니는 어둠 속으로 사라져갔네 돌기 같은 골목을 나사못처럼 돌고 돌아 나왔네 형은 천자문을 앞에 두고 쩔쩔매고 사춘기 누나는 책상 밑으로 날아 들어온 새를 잡지 못한다고 혼이 나 울었네 나..

이명 詩 2023.03.25

이명 [동해바다]윤정구 부채시/문창20년가을호

이명 [동해바다]윤정구 부채시/문창20년가을호 청라언덕 ・ 2022. 7. 31. 20:48 URL 복사 이웃추가 본문 기타 기능 윤정구 부채/ 이명 시 [동해바다] 윤정구부채시와 시인 ​ 윤정구 부채/ 이명 시 [동해바다] *문창20년 가을호 이명 시인 타고난 DNA의 힘, 시에 몰두하다 ​ 세상에 제일 무서운 것이 DNA라고 한다. 내가 선택하고 결정하며 살아가는 것 같아도 실제로는 DNA란 놈의 지시대로 우리가 선택하고 실천해가는 것이라고 과학자는 말한다. 따라서 게놈 분석을 통하여 글을 잘 쓸 사람, 그림을 잘 그릴 사람을 선별해낼 수 있고, 평생 노력해도 안될 놈에게는 다른 일을 추천할 수도 있다고 한다. 사실 예술이란 것은 99%의 노력으로 안되는 면이 있어, 1%의 타고난 재능이 더 중요한 ..

시평 2023.02.19

12월의 손님

12월의 손님 몸이 불편한 어머니가 그러했듯이 아내가 화투점을 본다 화투라 하면 질색을 하던 아내가 화투 만지는 것을 보면 세월이 그만큼 흘렀나 보다 이 산중에 올 이도 없겠지만 손님에 기쁜 소식의 점괘가 나오자 기분이 좋은 모양이다 삶이 우울한 것이라면 허무를 붙들고 즐거워하는 심정을 이해해야 할 것 같다 나는 시종 국수 먹을 괘가 나올 때를 대비해 라면을 준비해 둔다 손님이 온다는 점괘는 늘 맞지 않지만 짙은 갈색의 절망 한 두릅의 도루묵을 처마 끝에 걸어 둔다 시선 2022년 겨울호

이명 詩 2022.12.08

그때는 비

그때는 비 마늘 씨알이 작은 것은 마늘종을 제때 뽑지 않아서 그렇다는데 작고 맵고 아린 그 여자의 밭 조선 마늘에는 환향하는 여인의 눈물이 들어 있어 새벽에 내려가 보면 잎은 물방울로 가득하고 밭은 흥건하다 바짓가랑이가 흠뻑 젖고 마늘종을 뽑으면 자지러지는 소리가 난다 홍제천이 거슬러 오르고 허공이 내려앉고 중심이 단단한 기둥을 송두리째 뽑힌 마늘은 대들보가 사라진 집안처럼 후줄근하다 이제는 메말랐는지 마늘종 끝에 맺혀있는 맵싸한 눈물 한 방울, 벼락 한 올 오늘 새벽에는 까마귀 한 쌍이 소나무 숲에서 마늘종을 다 뽑을 때까지 따라다니며 대신 울어주었다 현대시 2022년 10월호

이명 詩 2022.10.20

산중의 달

산중의 달 허정철 기자 승인 2022.09.07 16:37 산중의 달 이명 지음/ 한국문연 2011년 ‘분천동 본가입납’으로 불교신문 신춘문예에 당선한 이명 시인이 최근 시집 을 펴냈다. 총 4부로 구성된 시집에는 마리골드, 산중의 달, 해무, 중림동 파출소, 서종을 지나며, 터미널, 꽃의 변신 등의 작품이 수록되어 있다. 시인은 “산중에서 보는 달은 도시에서 보는 달과 다르다”고 이야기한다. 차량이 물결을 이루고 있는 도시보다 더욱더 치열한 삶의 현장이 바다이고 산이다. 약육강식과 적자생존의 현장이지만 자신에게 부여된 생명력을 마음껏 발산하는 곳이기도 하다. 이승하 중앙대 교수는 시평을 통해 “산중에는 수많은 종의 나무와 꽃, 곤충과 짐승이 산다. 지금 살아 있는 딱따구리와 꾀꼬리, 벌레와 매미가 다 ..

기사 2022.10.02

귀머거리 바위의 채움과 비움의 미학-이명 시인의 시집 『산중의 달』 을 읽고

귀머거리 바위의 채움과 비움의 미학 / 오서윤 -이명 시인의 시집 『산중의 달』 을 읽고 이명 시인이 기거하는 동해서실, 명련재의 아침이 생각난다. 일찍 잠을 깼다. 어디선가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부드럽지만 거역할 수 없는 이명耳鳴이었으리라. 밖으로 나왔을 때였다. 온 몸이 붉은 빛으로 빨려들어가는 것 같았다. 산 줄기를 따라 시선이 멈추는 곳에 붉게 물든 바다가 세숫대야 모양으로 떠있었다. 이명 시인의 다섯 번째 시집 『텃골에 와서』의 시편 「동해바다」는 그 형국을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산중턱 능선과 능선이 가지런히 흘러내려 대야가 되고 바다는 세숫물이 되었다 ― 「동해바다 」 부분 눈시울이 붉어지는 전율과 함께 두 손으로 바다를 모셔들였다. 얼굴과 손을 씻는 행위는 몸과 마음이 정화되는 의식이..

시평 2022.09.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