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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장마

가을장마 가을장마는 섧다 배추에 무름병이 와서 밭을 갈아엎고 베어 놓은 들깨는 썩어가고 감은 떨어지고 사랑이 흘리고 간 눈물로부터 장마는 시작되었다 더 이상 비를 멈추게 할 수는 없지만 깨알 바닥으로 떨어지는 소리 비둘기는 들깨 더미에 산다 밭은 투전판 사랑이 혼절하고 비옷을 입고 매일 밭에 나와 비를 맞는 일이 일이다 월간 모던포엠 2021년 12월호

이명 詩 2021.12.01

증권가에서 시인으로 이명 시집 ‘박호순미장원’ 등

증권가에서 시인으로 이명 시집 ‘박호순미장원’ 등 기자명 홍진호 기자 입력 2021.07.22 17:18 수정 2021.07.22 17:25 댓글 0 한국거래소 상무이사 등을 역임 한 후 불교신문 신춘문예 등에 당선한 이명 시인이 최근 시집 ‘박호순미장원’을 출간했습니다. 이번 시집에서는 표제시 ‘박호순미장원’과 함께, ‘유마행’과 ‘화엄’, ‘서어나무 대웅전’, ‘도솔천 버들치’, ‘묵언 아기 진딧물’ 등 불교적 색채가 듬뿍 담긴 다수의 시들도 함께 실렸습니다. 이에 앞서 발간 된 시집 ‘기사문을 아시는지’에는 동행과 칡차, 또 하나의 도반, 건달 농사꾼 등 향토색 짙은 시들이 담겼습니다. 이명 시인은 쓴 시 ‘피어라 꽃’은 지난 2016년 증권시장 개장 60주년을 기념하며 한국거래소 외벽에 걸려 세간..

기사 2021.07.23

숲속에 바다

숲속에 바다 바다는 하얀 마스크 나는 검정 마스크 나는 숲속에 있고 바다는 하늘을 떠 다녀요 우리는 수평선에서 만나지만 안타까워요 서로 알아보지 못한다는 것이 나무와 바다 사이 바람이 있고 바다와 나 사이 벽이 생겼어요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바다는 무지개 마스크 나는 무명 마스크 털어내야 하는 그 무엇이 있어 바다는 도시로 떠나고 나는 바다의 발자국 소리에 귀를 기울여요 층층나무는 바다를 품고 창공을 향해 날개를 펼쳐요 모르는 사이처럼 파도는 도시에서 방파제를 넘고 나는 창을 닫아요 잃어버린 바다 사랑만이 남아 허공이 불타고 있어요 누가 불 질렀다고 해야 하나요 바다는 구름 마스크 나는 허공 마스크 모두가 슬픔을 이야기 하면 누가 기쁨을 말해요 모두 우울하다고 말을 하면 누가 즐거움에 대해 말하나요 모..

이명 詩 2021.07.06

분천동 속으로

분천동 속으로 바라보면 그 아름다움은 신선과 같았으니 아, 선생은 이미 강호의 진락을 얻었다*는 말 실감하겠네 늙은 부모 수연壽宴을 위해 강변 솔숲에 커다란 그늘막 두 개 치고 정자 언덕 위에도 상을 차리고 악사들을 부르고 조각배 두 대나 강물에 띄운 것을 보면 중양절을 맞아 국화주를 마시고 남해南陔와 백화白華를 번갈아 연주하여 흥취를 돋우고 또 웃음을 위해 몰래 작은 배에 기녀를 태워 장구 치고 피리 불며 멀리 강 가운데로 노 저어 가게 하였다**고 그날 모습 상세하게 전해주네 영지산 아래 부내마을 집들이 보이고 안개가 흐르고 한쪽 구석에 바리바리 짐을 싣고 온 말도 보이고 분주하게 움직이는 여인들도 있네 종택도 보이네 눈높이를 맞춰야 잘 보이는 분천헌연도, 산중이 환하네 * 농암聾巖 이현보가 지은 어..

이명 詩 2021.07.06

해무

해무 방파제에 서면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닐 때가 있는데 바다도 그런 것이어서 우주도 슬플 때가 있어 흘린 눈물이 바다라든지 별들이 뿌리고 간 설움이 응고된 것이라서 바다는 때로 슬픔의 덩어리가 되는데 어둠을 뚫고 그물을 건지러 나가는 배의 창에 눈물이 되어 흐르고 어스름 저녁 호미 날에 비치는 설움으로 돌아오는 것이다 몇 두름의 고기를 낡은 그물에 던져주는 것이다 백사장에 홀로 서 있던 여자가 벗어놓고 간 어둠이 스며들어 그날 밤은 달이 바다에 빠져 허우적거렸다 안개는 부풀어 오르기만 하는데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기사문에도 여름은 가고 삶은 그저 대수롭지 않게 물결에 쓸려 둥둥 떠다니는 가재도구처럼 바다를 배회한다 구절초가 피고 배추밭 기슭이 물결로 출렁인다 어둠의 관절이 삐꺽거리며 물속에서 여..

이명 詩 2021.06.06

강각에서의 하룻밤

강각에서의 하룻밤 어스름 저녁 강각에 올라 보니 맨 먼저 바람이 얼굴을 스치고 지나갔다 감촉이 부드러웠다 누군가 볼에 손을 대고 다가오는 것 같았다 물소리가 들려오고 그것은 어쩌면 흥얼거리는 어부가漁父歌 같았다 노을 가득한 하늘로 구름이 흐르고 있었다 누군가 노를 젓고 누군가 색동옷을 입고 춤추는 것 같았다 귀를 막고 두 손으로 귀를 막고 분어행盆魚行* 시를 지으며 얼마나 피하고 싶은 어지러운 세상이었겠는가 그때가 귀거래 귀거래하며 얼마나 그리워했겠는가 늙은 부모 계시는 고향집을 얼마나 아름답고 깊이가 있었겠는가 유구한 산천이 또 얼마나 즐거웠겠는가 강물에 잔을 띄워 술 마시며 노래하는 삶이 바위는 귀가 먹지 않았다 * 농암聾巖 이현보가 퇴계退溪 이황 형제에게 지어 보낸 장문의 시로서 그 당시 관료들을 ..

이명 詩 2021.04.01

법거량식으로

법거량식으로 백두대간을 넘어온 문자 몇 올에 도시의 삶이 묻어있다 이유 없이 우울하고 정체 모를 고독에 잠 못 이루고 무작정 어딘가로 떠나고 싶다는 그러나 그 숨결, 여기서는 향기가 되나니 이 산중에서 가난한 내가 답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수평선 타고 번지는 노을과 검정 보자기에 수북이 쌓여 빛나는 별과 까마득히 밀려오는 파도를 수레국화 꽃물 흐르는 밭과 함께 창공 가득 채워 오롯이 보내드릴 수밖에 시인정신 2021년 봄호

이명 詩 2021.04.01

곤줄박이 코드

곤줄박이 코드 왜 굳이 이 조그만 산중 집에 현판이 있어야 한다고 했는지 명필가에게 부탁해 그 두터운 나무로 제작해 보내왔는지 이덕무의 한시 족자 한 편쯤이야 들고 오지 않아도 될 일을 오겠다고 약속해 둔 날을 한 달이나 앞당겨 성하지 못한 몸으로 그 멀리서 단숨에 달려왔는지 돌아가서는 무엇이 급해 바로 숨을 거두었는지 가는 길 배웅하고 돌아와 보니 새 한 마리 현판 아래 누워있다 방파제를 넘은 파도가 비로소 절망한다 시인정신 2021년 봄호

이명 詩 2021.04.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