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 도서관 푸른 도서관 이토록 물렁한 도서관을 본 적이 없다 수심 깊은 하조대 바다 쉴 새 없이 두루마리가 펼쳐지고 갈매기 날고 바람이 편집하는 줄글들마다 흰 꽃 피고 꽃 피면 절벽은 환하다 물거품 이는 입구는 둥글게 부서지는 만다라 해독하느라 바위들은 머리가 하얗다 연륜 깊은 소나무 .. 이명 詩 2019.06.26
마찬가지 마찬가지 캄캄한 밤 기사문 선장들은 신이다 별의 이름을 갖는다 가깝고 먼 바다에 별 하나씩 띄워두고 통발을 걷고 그물을 걷는다 수면은 경계가 되고 경계 위로 별빛 따라 줄줄이 올라오는 몸들 제석천의 그물에 걸려 우리는 경계를 넘어서고 보이는 그물이나 보이지 않는 그물이나 희.. 이명 詩 2019.06.14
집 위의 집 집 위의 집 사람의 마을에서 빈집이 팔렸다는 소문이 들리더니 포클레인이 집을 부쉈다 적막과 어둠이 먼지를 뒤집어 쓴 채 뛰쳐나왔다 텃골에서 갈 곳 잃은 것들은 모두 산중으로 올라오는데 적막 따로 어둠 따로 집 두 채 또 늘어나겠다 고라니 기거하던 밤나무 그늘의 집, 잎들은 지고 .. 이명 詩 2019.06.14
풀, 날다 풀, 날다 땅콩 밭을 뒤덮은 풀을 뽑는데 왜 그대가 생각나나 울타리 너머로 멀리멀리 던져 버리는데 너풀거리며 공중을 날아가는 풀 산중 깊숙이 들어앉은 몸이 씨 뿌리지 않았다고 항변한들 무슨 소용이겠는가 그리움도 거추장스러워 남김없이 뽑아 던진다 풀은 밤마다 억세게 자라나는.. 이명 詩 2019.06.06
산중 도시 산중 도시 불현듯 물푸레나무 아래 집 한 채 보인다 잎은 떨어지고 바람 쓸쓸한 벽도 지붕도 없는 그늘 속의 집 당신인가 했더니 고라니 한 마리 집을 나선다 대낮에 닭은 울고 대설은 가까운데 투명한 집들의 마을 나뭇가지 하나 흔들리지 않는구나 바라볼수록 집은 늘어나고 마을을 이.. 이명 詩 2019.06.06
기둥 기둥 갑자기 바람 불고 먹구름 몰려오더니 장대비가 쏟아진다 산중에 우뚝 선 우람한 산벚나무 한 그루 온 몸으로 비바람을 맞고 있다 이리저리 몸을 흔들며 견뎌내는 그늘은 뽀송뽀송하다 지나가는 고라니 한 마리 물끄러미 들여다보는데 얘, 이리로 들어오렴 나, 이 숲의 기둥이야 비 .. 이명 詩 2019.03.29
나무 장터 나무 장터 남대천 둔치 묘목들이 웅성댄다 수군거리는 소리를 듣고 바람이 몰려온다 장꾼들이 무얼 알랴 이 지구의 주인이 나무라는 말을 증명이라도 하듯이 남천, 여린 잎들이 문장처럼 펄럭이는데 흐릿하게 잎맥이 보이고 그것은 후기 고생대의 후일담을 엮은 문집처럼 소소하다 한계.. 이명 詩 2019.03.29
완당초阮堂抄 완당초阮堂抄 서 있는 책은 읽을수록 향기가 짙다 산방산에 핀 밤꽃, 일필휘지로 갈겨 쓴 추사체다 잎도 아닌 것이 줄기도 아닌 것이 바람이 불면 부는 대로 온몸에 얼룩이 지면 지는 대로 꽃이라 하기엔 너무 서러운, 저것은 대정리의 눈물이다 서첩을 넘길 필요도 없이 잇따라 두루마리.. 이명 詩 2019.01.22
여자가 생겼습니다 여자가 생겼습니다 밤 줍는 일이 즐거워졌습니다 풀숲을 헤치며 모기와 싸우며 가시밭을 드나들며 밤을 줍는 일이 쉽지는 않습니다만 줄 사람이 있다는 것이 얼마나 큰 즐거움인지 노거수는 주먹만 한 알밤을 툭툭 아낌없이 던져줍니다 이 세상에서 생각할 수 있는 사람이 생겼다는 것.. 이명 詩 2019.01.22
토기 새 토기 새 홀로 있어도 울지 않는 새 보면 볼수록 생각이 깊어지는 수수한 새를 본다는 것은 바로 너를 본다는 것인데 색 바랜 날개 속에 내가 있다 한때, 비상을 꿈꾸던 시절이 바로 너였는데 빛 한 점 없이도 용하게 견딘 세월 짙은 향기 속으로 내가 잠기네 아라문학 2018년 겨울호 이명 詩 2019.01.01